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눈앞에 놓인 빳빳이 코팅된 하얀 A4 2장.
처음 한 장에는 시가 식구들의 생일과 남자 친구의 돌아가신 조부모님 추도일이 적혀 있었다.
다른 한 장, 그곳엔 알 수 없는 일정 금액들과 함께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생활비 계획서’
“우리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야.”
봉이는 뭔지 감은 오지 않았지만 일단 어른이 주시는 거니 감사하다며 받았다.
근엄한 자세로 고쳐 앉은 예비 시아버지는 엄청난 기밀사항을 발표하듯 봉이와 그의 남자 친구에게 말을 이어갔다.
“여기 보이는 대로 결혼한 후에 너희가 한 달 동안 어떻게 지출하고 저축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써놨다.
며느리는 얼마를 버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정도 선이라 가정하였고………자, 여기 봐라……너네 둘 식비는 이 정도쯤이 나올 것 같고……통신비는……”
종이엔 휘갈겨쓴 손글씨로 가계부 적듯이 식비, 관리비, 경조사비, 보험료, 문화생활비, 통신비, 용돈 등의 리스트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의 급여와 그분들이 대충 어림짐작한 봉이의 급여가 더해져 산출된 한 달치 예상 생활비가 조목조목 목록에 덧붙여져 있었다.
오, 마이 갓
봉이는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알을 굴려보았다.
어떠한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다 큰 성인 둘이 결혼을 앞두고 받을 법한 선물 목록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만 맴돌았다.
심지어 그걸 코팅까지 해서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까지??’
코팅된 종이의 뒷장에도 무언가가 쓰여있었다.
매달 급여에서 예상 총지출액을 빼고 나머지에 12를 곱하고 거기에 25를 곱하고…
남자 친구의 평균 은퇴시점을 가정하여 맞춰진 최종 저축 예상액이 적혀있었다.
“이런 것까지 해주는 시부모가 우리 말고 어딨겠냐
소중히 잘 간직해서 그대로 실천하길 바란다”
‘그러게 말이에요.
부탁한 적도 없는데.. 제가 알아서 합니다’
신박하면서도 기괴한 첫 결혼 선물이었다.
영화 마틸다가 생각났다.
괴상하고 숨 막히는 집안의 유일하게 사려 깊고 영리한 마틸다.
살면서 본 구 남친이자 지금의 남편은 다행히 시가의 마틸다 캐릭터에 가깝다. 허나 그의 다른 점은 성인이 되어서도 기꺼이 그분들을 참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선을 넘은 다양한 상황에도 묵묵히 받아주는 유일한 자식으로서 말이다.
그날의 선물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 같은 칠푼이, 팔푼이 콜라보라 정의된 아들과 며느리 증명서였다. 그토록 바랬다던 아들의 새 출발에 불신과 염려로 탄생된 책받침 말고 축복과 응원만 가득한 글이라면 진심으로 고마웠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 뭘 받긴 받았는데 안 받은 걸로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차분히 미래를 계획하고 저축하고 알뜰히 잘 살고 있다.
코팅된 종이들은 결국 어디다 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후부터 서서히 내가 정한 감당 한계선의 수위를 올려야만 했다.
슬프게도 이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