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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준 Apr 15. 2021

조각글 쓰기16편

무제

<조각글 쓰기>

정말 가볍게 쓰기 시작했던 조각글이 어느새 16편이나 쌓였다. 처음에는 3~4줄 정도로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다 보니 할 말이 많아졌다. 회사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조각 글로 브런치 작가님들과 수다를 떨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요즘 쓰는 글들이 '정보전달'의 성격에 가깝다 보니, 조각 글에서는 나의 생각에 대해서 조금 풀어봐야겠다는 생각 하는 요즘이다. 언젠가 조각글 쓰기가 50편 정도 쌓이게 된다면 몇 개의 글을 뽑아 정리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아무래도 주제도 너무 다양하고 글들이 짧다 보니 '시집'처럼 '조각 글 집'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조각조각 모이다 보니 '누더기 옷'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글을 가볍게 쓰기 위해 조각글 쓰기를 만들다 보니 '다른 글'을 연재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편하다. 퇴고도 딱 1번 정도만 하기에 완성도는 상당히 떨어진다. 글을 쓴다는 느낌보다는 채팅창으로 대화를 하는 것에 가까운 글이다. 그렇기에 독자에게 조금은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라고 있다. 


요즘 계속 조각글을 쓰다보니 발행 키워드에 조각글이 생겼다. :)




<페르소나>

브런치 작가를 신청할 때 처음 썼던 글은 페르소나에 관한 글이었다. 조금은 난해했는지 첫 도전에서는 시원하게 탈락했다. 개인적으로는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너무 무거운 느낌이고, 사회적 가면 혹은 부캐 정도의 가벼운 느낌 정도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성격에 관한 말 중에 '지구에 60억 명이 산다고 한다면, 사람의 성격은 60억 가지로 분류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은 하나의 성격을 가질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혼자 있을 때, 친구들과 있을 때, 부모님과 있을 때, 연인과 있을 때, 사회생활을 할 때의 나는 조금씩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다. 친한 친구랑 놀 때와 봉사를 할 때에도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기계처럼 on/off를 눌려서 발현되거나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닌데도, 나에게 주어지는 기대감, 누구와 상호작용을 하는지,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나의 다른 표현형이 도출되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굳이 머릿속으로 진짜 내 성격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나면 괜히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런 다양한 모습들 간의 괴리가 적으면 문제가 없는데... 그 차이가 심하면 괴로워졌다. 각자의 다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민망해지는 순간도 생기고 위선이 아니냐라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으나... 결국은 모두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찾아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양한 가면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어 점점 하나로 수렴해가는 중이다. 


    

<착함의 기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오고 있다. 가끔 '정말 착한 사람이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럴 때면 나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 같아요'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러면 대부분 본인은 착하지 않다고 한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착하다고 생각했는지도 기준이 애매하다. 그냥 정말 선함이 느껴지거나 손해를 보고도 남에 무한정 베풂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베푸는 법을 잘 몰랐다. 늘 나에게는 부족하고 결핍된 상황이 많았기에 베풀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고 무엇을 베풀어야 할지 몰랐다. 대학생이 되면서 봉사를 해보았다. 착함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사람들은 왜 봉사를 하는지 알고 싶었다. 봉사를 하면서 '보람찬 순간'도 있었지만, '귀찮았던 순간'도 있었고 '힘들었던 순간'도 많았다. 다양한 봉사를 시도해봐도 항상 착함(?)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기에 봉사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착함을 가지지 않고는 나의 봉사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봉사는 착한 사람이 해야 된다는 잘못된 프레임이 사로 잡혀있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 나는 베풀 수 있는 다른 것이 생겼다. 그건 나의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물질적인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온기를 나누는 정도만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보려 했다. 하지만 봉사라는 이름은 여전히 나에게 맞는 것 같지 않아 멘토링이라는 이름을 걸쳤다. 상담이라는 행위가 들어가니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이건 꼭 착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일 거야.


나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착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쁘지도 않아요.'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내가 착하다고 착각한다. 

아니면 착함의 기준은 나의 시선이 아니고, 타인의 시선인 것일까?


어쨌든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안 착한 사람'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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