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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an 31. 2017

게장 알러지를 치료한다

장애를  치료한다는 것


나는 게장 알러지가 있다.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가지게 됐는지, 그건 분명치 않다. 확실한 건 게를 익히지 않고 먹으면 입, 목, 귀가 한동안 가렵다는 사실이다. 게장 알러지를 치료하려 애쓸 생각은 없다. 그냥 게장을 안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게장 알러지가 있는 작업치료사다. 내가 하는 일은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장애로 인해 하고 싶은 작업(일이든 놀이든 일상생활이든)이 있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나는 장애 그 자체를 치료할 때도 있지만, 치료하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장애는 치료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장애는 내 게장 알러지처럼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대하는 사람들에게 게장을 안 먹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장애는 치료하지 않고도 해소할 수 있다고. 장애를 치료할 수 없을 때, 장애를 능동적으로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애라는 상태에 적응하는 거라고. 내가 게장을 안 먹는 상태에 적응했듯이.


하지만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게장을 먹지 말라는 말이 너무나 가혹하다. 그래서일까? 가끔씩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게장 알러지를 치료하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혹은 소중한 사람의) 장애가 완전히 치료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이내 게장 알러지를 치료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게장 알러지를 치료하는 척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나는 게장 알러지를 어떻게든 치료받겠다는 사람들을 이끄는 무기력한 항해사처럼 기적을 향해 항해한다. 그 사람들에게 게장을 먹지 말라는 건 틀린 대답일 뿐이다. 정답은 기적을 향한 끝을 알 수 없는 항해 뿐이다. 그럴 때면 나는 지침 없는 나침반을 가지고 꿈을 찾아 방랑하는 항해사가 된다.

"네, 아주 적은 확률이기는 하지만 당신의 게장 알러지는 완치될 수 있을 거예요. 완전히 낫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좋아진다면 그걸로도 의미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내가 저 사람이라도, 기적을 바랄 테니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기적을 볼모로 돈을 버는 것은 다른 얘기다. 기적을 볼모로 돈을 버는 것은 종교 지도자나 사기꾼의 영역이지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다. 기적의 다른 말은 우연이고, 병원은 카지노가 아니다. 우리가 전문가로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배팅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나아지러 온 것이다. 나아질 게 없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 것이 맞다. 우리 병원이 치료를 거부한다고 우리 병원을 욕하며 다른 병원으로 떠나게 만드는 것이 차라리 옳은 일이다.


게장 알러지를 치료해 달라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진 것은 의사와 치료사들 그리고 사회의 책임이다. 어떤 환자가 들어오든지 작업치료 처방을 관습적으로 냈던 사람들은 의사고, 그 처방에 한 번 저항해 보지도 않고 기적을 사실처럼 말한 사람들은 작업치료사며(물론 병원 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차별한 것은 우리 사회기 때문이다.

재활의학과로 입원한 사람들 중에 상지 기능과 인지 기능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보통 빠짐없이 작업치료를 처방 받는다(이상하게도 하지 기능에만 문제가 있으면 작업치료를 처방 받지 않을 때도 있다).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하듯 작업치료를 처방한다. 그렇게 작업치료를 처방 받고 재활치료실로 온 사람들은 정작 작업치료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의사한테 작업치료 처방을 받았으니 치료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처방전에 있는 약이 무엇인지 공부해서 먹지 않듯이, 사람들은 작업치료가 무엇인지 공부해서 치료받지 않는다. 문제는 그렇게 작업치료 처방을 받아 오는 사람들 중에 작업치료를 받기에 썩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작업치료를 하는 게 불만이다. 의식이 없다는 것은 동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고, 동기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작업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작업이란 하고 싶은 활동인데,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작업을 어떻게 정의한단 말인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정의하지 않고 작업치료를 시작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작업치료가 의미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의식 수준이 회복된 다음이어야 한다. 작업치료 말고 도수치료나 운동치료라고 말하든지. 작업치료를 받아야 할 지 판단하는 것은 왜 의사의 영역일까?


그래봤자 나는 이런 불만들을 마음 속에 품고 말이 안 되는 치료를 반복하고 있는 작업치료사다. 나는 의식이 없는 사람의 강직을 줄이기 위해 마비된 팔을 붙잡고 스트레칭 한다. 의식이 없는 사람의 구축을 방지하기 위해 마비된 어깨 관절을 살살 움직인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 팔로, 이 어깨로, 뭐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 치료가 이 사람의 삶의 질을 증진시켰다고 할 수 있을까?', '난 이런 치료를 하고 돈을 벌어도 될까?'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랬다가는 내가 너무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침 없는 나침반을 들고 게장 알러지를 치료하기 위해 방랑하는 무기력한 항해사다.


작업을 모르는 사람들이 작업치료를 처방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환자를 보고 장애를 확인한다. 치료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여러 가지 치료를 처방하고 입원시킨다. 실낱같은 회복의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렇게 의사 한 명 당 약 40명의 입원 환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의 눈 앞에 있는 누군가는, 40개의 물건이 아니라 40명의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무슨 치료를 받을 지보다 치료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지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40명 개개인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지, 한 명의 의사는 과연 다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치료해야 할 것은 게장 알러지가 아니라, 게장 알러지를 무조건 치료해야 하는 것인 양 기계같이 되뇌이는 나같은, 소위 전문가들의 고정관념이 아닐까? 난 내가 작업치료사인 게 부끄럽다. 부끄러운 건 과연 부끄러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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