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교사를 그만두었다

27. 긍휼의 마음가짐-3

by jeongihnK

그 해에 대규모의 전자기기 구입 예산이 내려온 것이 있었다. 기억에는 몇 천만 원 단위였다. 나는 부장일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전 학년도 정보부장 선생님께 그 예산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문의를 했는데 그 선생님도 사실은 전문가가 아니었던 것인지 그 돈은 이미 사용 예정이 다 되어있으니 행정실에서 사용하라고 할 때까지 그냥 두면 된다고 설명을 했다. 나는 그런 줄로만 믿고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고, 10월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문이 하나 내려왔다. 아직 그 예산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11월 말까지 모두 사용하라는 독촉의 공문이었다. 전 정보부장님도 결국은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큰일이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얼른 알아내고 사용해야 한다.'


몰라서 한 실수이니 나 스스로를 조용하고 너그럽게 용서하며,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어떻게 그 예산을 사용하는 것인지를 배웠다. 행정실에 친분도 전혀 없는데 찾아가서 하나도 모르겠다고 질문을 하고, 방법을 묻고, 다른 학교 정보부장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컴퓨터, 모니터, TV 같은 기기들을 구입할 수 있는 목적의 예산이었는데 일단은 교내 장비들의 연식을 정리하고, 오래된 것부터 일단은 폐기를 계획해야 했다. 폐기하는 위치가 정해지면 그 자리에 새로 구입할 장비들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냥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양, 구입 가격, 브랜드 등등을 조사해서 투표하고 회의를 거쳐 결정해야 했다. 회의를 계속하여 여러 차례 열었는데 회의 소집을 위한 기안을 올리고, 회의를 하고 나면 회의록과 명부를 작성하고, 보고서도 올리고... 끝도 없는 서류 생산의 반복이었다. 날짜가 촉박했기에 쉬엄쉬엄 할 수도 없었고, 야근에 야근을 더했다.


그래도 나름 일이 착착 잘 진행되었다. 구입 업체와 잘 협의되어 수량도 확보하고, 행정실과도 잘 소통되었다. 이제 기존 장비를 폐기하고 그 자리에 기기 설치만을 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이 중간에 컴퓨터가 바뀌면 적응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었다. 학기가 다 끝나고 겨울방학 때 바꾸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교감선생님과 이에 대해 상의를 하기 위 교무실을 찾았다. 지금 장비들을 구입은 해 놓되, 설치는 겨울방학 때 하여도 된다면 그때 하겠다는 것. 흔쾌히 가능하다 하시고, 이에 보태어 교감선생님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바꾸었으면 하는 장소의 컴퓨터 몇 대를 이야기하면서 어디 컴퓨터를 어디로 옮기고, 어디 컴퓨터를 어디로 옮기고 하는 복잡한 제안을 하셨다. 기존에 회의를 진행할 때 이미 장소를 결정하여서 바꾸기 힘들고, 내년 예산으로 구매해 보겠다 하였으나 어떤 설득에도 의견을 굽히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그 해 겨울 방학에는 5주 간의 유럽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 여행 계획서를 교감 선생님이 직접 결재를 하며 허가를 해 주셨으니 그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겨울방학 때 여행가지? 그럼 설치 업체에 미리 설치 장소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놓으면 알아서 설치하도록 하고 나는 감독만 잘하면 되지. 걱정하지 마~"


"감사합니다."


"근데 내가 이 컴퓨터들을 학교에 두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아. 내가 우리 집에 가져가서 잘 보관했다가 설치 날짜에 다시 가지고 나올게."


"예?"


집에 학교 장비를 가져가서 보관한다니. 작은 물건들도 아니고 컴퓨터와 모니터, TV인데 그걸 다 가지고 가시겠다고 하신다. 아무리 안 된다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을 그냥 차에 실어드리자고 했고, 행정실에도 보고한 후, 결국 설치되지 않은 새 컴퓨터들은 교감선생님의 차에 실려 먼 길을 떠났다. 저 컴퓨터들이 잘 돌아올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만 혼자서만 이 상황을 처리한 것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즐겁기는 했으나, 설치 예정 날짜가 다가올수록 사실 좀 불안했다. 그러다 그날이 결국 오긴 왔다.


나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현지 시각으로 새벽이었는데 전화벨이 마구 울렸다.


"여보세요?"

"선생님 지금 어디야? 오늘 컴퓨터 설치하는 날인 거 몰라?"

"네? 저 아직 귀국을 안 했는데요?"

"선생님 진짜 이러기야? 이런 식으로 자기 일에 책임을 다 안 하고 가만 안 둘 거야!!!"

"교감선생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셔서..."

"무슨 소리야? 내가 컴퓨터 설치에 대해 뭘 알아야 하지! 책임자가 출근도 안 하고! 돌아오면 각오해!"


엉망진창이었다. 교감선생님을 믿은 내가 잘못이었다. 결국 컴퓨터 설치 업체에 연락해서 설치 일정을 내가 귀국한 다음 날로 다시 조정했다. 교감선생님께 설치 위치를 정리한 파일을 드렸는데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신다고 했다고. 나는 연신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해야 했다. 께 여행하던 친구는 새벽이라 잠에 들었었는데 내 통화 소리에 잠을 설쳤다. 교감선생님 정말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고 했다. 따져도 될 문제라고 화를 내주었다. 나는 한숨만 쉴 뿐.


나는 한밤 중에 도착하는 비행기로 공항에 들어왔고, 집까지 도착한 시각은 깜깜한 새벽이었다. 대충 씻고 잠들기에 바빴고, 다음 날 나는 장비 설치를 위해 시차 적응이고 뭐고 부랴부랴 출근을 해야 했다. 다행히 이루어진 장비 설치는 아주 순조로웠고, 설치 장소만 업체에 전달하니 알아서 다 설치해 주시고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넘겨주지 않았다고 하시던 설치 위치에 대한 문서는 교감선생님 책상 위에 아주 잘 있었다. 교감선생님께 일을 마치고 보고를 했다. 나를 교무실 소파에 잠시 앉으라고 했다.


"선생님, 내가 그 컴퓨터들을 좁아터진 집에다 방학 내내 이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예? 그건 교감선생님께서 직접 가져가신다고 말씀하신 거였는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학교 물품을 왜 집에 가져가겠어? 선생님이 나더러 맡아달라고 해서 그런 거지!"

"그날 ○○선생님이 차에 실어주시고, 행정실장님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선생님!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을 좋아할지 어쩐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는 선생님이 정말 싫어! 알았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싫다는데.


"어쩐지...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


"진짜 싫다니까?"

"네."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걸까. 내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하길 바라는 걸까? 이번에는 고개도 같이 끄덕여드렸다.


"허참... 선생님 진짜 싫어!!"

"네, 그럼 저는 설치 다 했으니 퇴근해 보겠습니다."


한숨 쉬시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뒷모습이 기억난다.


'저도 교감선생님 싫어요.' 이 말은 마음속으로 생각만.


그때부터였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이니 우리가 병이 깊은 사람들을 '긍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긍휼의 마음가짐으로 보기로 했다.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는 사람의 책가방을 대신 메주는 것처럼. 그들이 화를 내고, 난리를 쳐도 나는 '아, 그러셨어요? 저런 저런...' 하며 그들을 보살펴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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