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기록

남편의 군화를 꺼내 신었다.

대한민국에서 260mm 대(大)발이가 살아가는 법

by namtip

신발장 맨 위에 있는 남편의 군화를 꺼내어 신었다. 군화는 270mm 사이즈이지만 두꺼운 양말을 신으니 걸을만했다. 그런데 이렇게 무거울 수가. 쇼핑몰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늘 신던 운동화로 갈아 신고 또 나가려는데 에효, 뭘 나가나 싶다.


어릴 때부터 발이 컸다. 고등학교 때 250mm 검정 구두를 신을 때까지만 해도 훗날 10mm가 더 클 줄 몰랐다. 신발을 사러 가면 신발가게 사장님들이 그러셨다. "아이고, 발이 크네. 근데 250이면 다 컸어. 더 자랄 일은 없을 거야. 그다음은 사이즈가 없어. 구하기 힘들지 뭐"


사장님들의 말이 맞았다. 그다음은 없었다. 그리고 더 자랄 일이 없어야 할 내 발은 그 후에도 계속 자랐다. 국내 여성화는 250mm까지만 나온다. 더 큰 사이즈는 복불복. 있으면 사고 없으면 못 산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참으로 애매한 255.5mm. 급한 대로 반내림을 해서 어떻게든 버텼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니 발도 커진다는 동네 언니들의 말처럼 정말로 발이 커져버렸고, 마침내 도달한 260mm.


그럼 사이즈만 문제냐? 발 모양 또한 신발 고르기에 까다롭기 그지없다. 둘째 발가락이 엄지보다 길고 발바닥이 두툼한 전형적인 돌쇠 발. 그래서 그런지 여름에 멋 낸다고 페디큐어를 바르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지난 세월 볼 넓은 내 발을 작은 신발에 구겨 넣고 신다 보니 새끼발가락은 항상 동상이 걸린 채로 겨울을 나야 했고 엄지 옆에 쑥 튀어나온 나의 두 번째 발가락은 덕분에 아주 잘 휘어져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쁜 신발에 대한 나의 욕망은 클 수밖에 없다. 이게 내 운명이려니 하고 남성화 중에서 잘 골라 골라 신발을 사도 계산할 때쯤이면 여성화 코너에 눈길이 머물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 20년 전에 사장님들이 요즘애들은 잘 먹어서 내가 어른이 되면 다들 발이 클 것이니 걱정 말라고 하셨었는데, 나만 잘 먹었나.

다양한 신발을 신고 싶은 대(大)발이




군화를 꺼낸 날은 스키니 진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싶은 날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신발장을 올려다보는데, 그때 남편의 군화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껏 남성화에서 잘만 골라 신었는데 까짓것 군화면 어때. 그런 심정으로 호기롭게 신고 나갔다가 결국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요즘 자꾸만 딸의 발 사이즈를 확인하게 된다. 딸아이의 신발을 살 때면 8살 평균 사이즈인가요?라는 질문을 꼭 하게 된다. "그럼요, 8살 여자애들 딱 평균이에요"라는 이 말이 왜 그리 좋은지. 내 딸은 신발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신발을 막 고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대발이는 전국에 세 켤레 남은 260 사이즈의 여성화에도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면 다시 신발 구경을 간다. 대발이들은 이렇게 사계절을 기다린다.



P.S

미국에는 큰 사이즈 신발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지난 여행에 새 신발용 빈 캐리어를 가져갔다. 듣던 대로 한국에서보다는 사이즈도 다양해서 봄, 가을 신발을 세 켤레나 건졌다. 그것도 여성화에서 말이다. 캐리어를 다 채울 수는 없었지만 마음만은 참 풍요로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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