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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tip Jan 25. 2024

책의 맛

오랜만에 중고서점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인문학과 에세이가 맞닿은 서가에서 꽤 오래 서성였다. 그저 제목을 보며 서 있는데도 참으로 풍요로웠다. 읽지 않아도 벌써 마음이 꽉 차는데 꺼내어 들면 오늘은 책을 사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너질게 뻔하다. 조그만 컵에 담긴 시식코너의 음식이 유난히 맛있듯 서점에서 훑어보는 책의 맛은 꿀맛이다. 평소에는 잘 들어오지 않던 책들도 서점 책장 앞에서는 돋보기로 보는 듯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 있게 다가오고 어쩌다 멈춘 페이지에서는 인생문장이 발견된다. 


우선 하나씩 꺼내어만 보기로 했다. 절대 사지는 않을 거니까 사심 없이 작가도 살피고, 책소개도 본다. 괜히 책날개도 접어다가 폈다가 하며 책장 한편에 쌓아두었다. 오랜만에 시집도 읽어보고 싶었다가,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책도 찾아보았다. 요즘 해이해진 것 같아 자기 계발서 코너 앞에서 정신 좀 번쩍 나게 하는 책을 찾느라 한참을 쭈그려 앉아있었다. 아니지. 노년에 쪼들리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하니 갑자기 경제서적을 검색했다. 앉아있다가 급하게 일어나서 잠시 어찔했는데 청초하게 분위기를 잡고 싶었으나 허벅지는 튼튼해서 중심은 또 잘 잡힌다. 


차곡차곡 양손에 책을 들고 돌아다니다 보니 열 권이 넘었다. 이참에 새로운 책을 사고 집에 안 읽는 책들은 다시 파는 게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점에 들어오기 전의 결심은 온데간데 사라졌지만, 다른 것도 아닌 책을 사는데 돈과 시간을 쓰는 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괜한 호기를 부린다. 


계산을 하러 가기 전에 꼼꼼히 다시 살폈다. 열 권을 다 사는 건 무리다. 눈물을 머금고 추리고 추려서 6권의 책이 남았다. 이것도 많은가 싶었지만 이번에 고른 <괴테의 말>은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이다. 짧은 명언집이니 내용은 묵직하지만 읽기엔 부담이 없을 예정이므로 5권을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진하게 우겨본다. 


그렇게 손에 잔뜩 책을 든 채로 집에 오는 길. 책의 맛에 빠진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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