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걸 잘 못 먹는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신라면도 웬만하면 안 사 먹거나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먹을 수밖에 없다면 라면 수프를 2/3 정도만 넣는다.
매운걸 못 먹게 된 핑계를 대자면 우선 엄마가 매운걸 못 드시기에 어릴 때 우리 집엔 빨간 음식은 올라온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갔는데 고춧가루가 들어간 닭볶음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엇. 이상하네 우리 집 닭볶음탕은 간장만 들어가 있는데? 지글지글 빨갛게 끓고 있는 닭볶음탕을 보며 신기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이 오히려 어안이 벙벙했었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어떤 유전자가 발휘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매운맛을 즐긴다. 첫째가 3살 때인가. 상위에 놓인 김치를 집어 먹고서는 눈알을 부라리며 그 뒤로 김치 없이는 밥을 안 먹겠다고 생떼를 부리곤 했다. 어른인 나도 김치를 잘 즐기지 않는데 3살짜리 아들이 김치를 덥석덥석 집어먹는 걸 보면 입맛도 타고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남매라 그런가 둘째도 오빠를 따라 김치도 먹고 요즘엔 마라탕 1단계까지 거침없이 맛있게 먹곤 한다.
이것도 비밀은 아니지만 나는 마라탕 1단계는 사실 매워서 끝까지 잘 못 먹겠고, 0단계는 즐길만하다. 우리 동네 0단계는 신라면 보다는 덜 맵던데 가게마다 다르려나? 어찌 되었건 마라탕까지 먹는 걸 성공했으니 많이 컸다.
마라 얘기가 나온김에 오늘 점심 얘기를 해볼까. 오늘 점심은 마라탕과 마라샹궈를 먹는 팀으로 나뉘었다.
마라샹궈라. 마라탕보다는 좀 더 매운 볶음이라고 하기에 호기롭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두부면과 버섯까지 추가시키고, 혹시 모를 매운 상황에 대비해 꿔바로우도 시켰다. 마라샹궈는 처음이라 기대가 됐는지 11시 반부터 배가 꼬르륵거리고 12시가 좀 넘어가자 위가 요동을 쳤다. 일을 해야 하는데 검색해서 본 마라샹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12시 30분. 너무나 감사하게도 예상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배달아저씨가 음식이 가득 담긴 비닐을 책상에 올려두셨다. 꽁꽁 싸맨 비닐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올라오는 마라의 향기. 과연 나는 마라샹궈 0단계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혀에 천불이 나서 물만 들이켜고 말 것인가.
1시 정각. 먼저 다른 직원이 동그란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와! 아까 배달앱으로 시킨 두부면과 버섯들이 먹음직스럽게 볶아져 있다. 냄새를 맡아보니 그리 매운 것 같지 않다. 전자레인지에서 막 꺼낸 햇반 껍질을 까서 두부면을 올려 한입 크게 먹었다.
맵다. 그런데 맛있게 맵다! 다행히 나를 포함한 몇몇의 직원들이 매운걸 잘 못 먹어서 0단계를 시켰기에 망정이지 1단계를 시켰으면 나는 한입도 못 먹을 뻔했다. 입이 얼얼했지만 먹을만해서 밥 한 공기를 뚝딱 먹고 중간중간 물을 먹어가며 마라샹궈 그릇을 비웠다.
그리하여 신라면도 잘 못 먹는 내가 마라샹궈까지 먹는 날이 오게 된 것이다. 매우 뿌듯한 날.
이쯤에서 신라면도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