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기록

사과를 보면

이우환 -시간의 여울

by namtip

뒷 베란다에서 언젠가부터 시큼한 냄새가 떠돌았다. 밖에서 날아오는 냄새겠거니 했는데 이제는 거실에 앉아서도 맡을 수 있을 만큼이다. 베란다를 정리하기로 했다. 잡동사니를 넣어둔 캠핑 상자 아래 박스.

거기에 물러터진 사과가 있었다.


이우환. 사과를 볼 때면 이우환을 떠올린다. 그렇게 된 지는 꽤 됐다. 예술가 이우환은 어느 서점에서 알게 됐다. 대학 새내기 시절 중고 서점에서 이어령의 옛 책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찾던 책이 없어 서점주인에게 이어령의 다른 책이라도 있는지 살펴봐달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화가 이우환을 아냐는 질문이었다. 아니요. 모릅니다. 그럼 이 책을 읽어봐요. 이어령 선생이 추천사를 썼으니 아마도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날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 책장을 차르르 넘기다 처음 본 글이 바로 <곰팡이 핀 사과>였다. 썩어가는 사과를 보며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던 예술가에게 나는 단박에 매료됐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자신의 방에 들어섰을 때 그는 썩어가는 사과 냄새를 맡았다. 치워버리려다 이내 생각이 바뀌었단다. 썩어가는 존재가 이토록 향기롭고 고독하게 불타오른다며 감탄했다. 그는 사과의 곰팡내에 행복감에 젖었다. 그리고는 썩어가는 사과를 바라보며 한참을 방 안에 앉아있었다.


베란다에서 퍼렇게 뭉개진 사과는 삼청동의 한 갤러리를 떠올리게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이우환의 전시회였다. 글 쓰는 이우환을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날 갤러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큰 붓으로 한 번에 그은 점. 그 점들이 무수히 이어진 다른 작품들.

삶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다는 이우환. 그의 작품들은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다.


그림을 보며 그와 작품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영혼이 자유로운 이우환이 이렇게 정갈한 그림을 그리다니. 모든 작품이 꽉 차 있는 듯 비어있었다. 갤러리가 닫을 때까지 그의 작품 앞에서 이우환의 평범한 하루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는 일상의 흐트러짐과 부족함을 원했다. 손님이 다녀간 다음날 아침. 집안이 너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 보고는 인간적이지 않다고 했다. 프라이팬이라도 조금 비뚤게 걸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제야 그의 작품이 이해가 간다. 이우환이 말하는 여백이라는 게 그동안 읽었던 글에서 보인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점을 찍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겠다. 정갈하게만 보였던 그의 작품이 다소 느슨하게도 보인다.


삶에서 그 단 하나의 점 이외의 여백은 내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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