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기록

시인의 언어는 욕심낼만하지

할아버지의 시집을 읽는 아이들

by namtip

점수에 맞춰 들어간 대학에서는 첫사랑이 시작되었고 당연한 듯 끝이 났다. 울고불고하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내게 아빠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건넸다. 슬픔을 삭히기에 헤세의 책은 어려웠고 힘들었다. 데미안을 중반까지 읽다가 책장을 덮고 다시 동주의 시를 펼쳤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 마음을 그가 담담히 위로했다. 사춘기 때 거칠어진 마음이 나이가 들면 고와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버석거렸다. 파도가 밀려오면 무너지고 흩어져가는 모래 같았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소개팅이 들어왔다. 막 미용실에 다녀온 티가 팍팍 나는 내 동생 친구의 한 살 많은 대학 선배. 별 헤는 밤은 몰라도 천체의 운동이라면 관심이 많다는 그의 말에 실소가 나왔다. 정말 맛있는 집이 있다며 데리고 간 레스토랑은 알고 보니 나의 단골집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는 많이 아쉬워하던 그 사람의 수줍음이 집에 와서도 계속 맴돌았다.


결혼 후 좁은 신혼집에 내 물건을 옮기는 일은 골칫거리였다. 막 결혼한 새댁의 마음은 왜인지 모르게 헛헛하다. 어떻게든 그 마음을 채우려 큰 물건, 작은 물건 할 것 없이 다 끄집어냈다. 조그만 볼펜 하나까지 다 가져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산더미 같은 책들을 끈으로 묶고 있는데 친정에 책은 다 두고 가라는 엄마의 핀잔이 들려왔다. 맞는 말이었다. 조그만 신혼집에 내 물건들만 다 들일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몇 권만 상자에 넣었다.


신혼집 첫 집들이. 아담한 복층 오피스텔에 뭐 그렇게 볼 게 있는지, 뒷짐을 진 아빠가 천천히 집안을 살펴봤다. 그러다 마루 책상에 덩그러니 꽂혀 있는 윤동주 시집을 보고는 늙은 아빠의 눈꼬리가 예전보다 더 내려갔다. 더 부드러워졌다. 이 책을 여기까지 들고 왔냐며 그렇게 반겼다. 그날 우리는 어설픈 내 요리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한 남자의 아내라는 자리가 겨우 익숙해질 때쯤 아이가 태어났다. 다른 엄마들은 막 태어난 아이를 물고 빨고 잘만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막막했을까. 젖은 풍요롭게 나오는데 마음은 고단했다. 나와 아이가 동시에 충만해질 수 있는 길을 알고 싶어 젖을 물리며 시를 펼쳤다.

우리 아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가마목에서 가릉가릉/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 소올 소올/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시를 소곤거리니 생기가 돌았다. 시간이 지나도 진부하지 않은 동주의 언어는 아이에게 전달되자 더욱 반짝였다.


내 책장에서 나처럼 윤동주를 만지고 들으며 자란 아이들이 마침내 할아버지의 시집을 발견했다. 원래 할아버지 책이었냐며 신기한 듯 물었다. 아이들이 들고 온 시집은 아무도 모르게 계속 바래어져 겉표지의 끝이 많이 벗겨져 있었다. 여덟 살과 열 살이 번갈아 가며 낡은 책 냄새를 맡으려 코를 킁킁거렸다.


나와 아빠와 아이들이 동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바라보는 순간은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우주의 시간처럼 흘렀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내 시집을 탐낼 때마다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시인의 언어는 충분히 욕심낼만하니까. 이 세상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켜켜이 쌓인 시는 단단한 반석이 될 것이다.


아빠와 내가 읊조리던 동주의 시가 아이들의 삶을 관통하길. 그리고 막힘없이 흘러가길 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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