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9일 & 20일 차 (2023년 1월 29일 ~ 30일)
여행 19일 차. 스위스 몽트뢰.. 인근의 생-징골프 라는 곳에 있는 숙소. 날은 맑고 기온은 영하 2도 정도.
아이들과 여행을 온 이후로, 많은 일정 속에서 피곤하긴 하지만 늘 새벽에 잠이 깬다. 시차 적응 탓도 있겠지만 그날 하루 어떤 일정으로 어떻게 여행을 할지, 그날 아침은 무엇으로 해서 아이들과 먹을지, 날씨는 어떤지, 아이들 컨디션은 어떤지 등등.. 새벽에 나의 잠을 깨우는 "생각 거리"들이 머릿속을 긁어서 늦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가끔은 한밤중 한국에서 날아오는 카톡 메시지나 전화 때문에 잠을 깨기도 했는데..
오늘도 여지없이 새벽에 잠이 깼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잠을 깨우는 강력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어제 밤늦게 숙소에 도착해서 볼 수가 없었던 숙소 옆 호수(레만 호수) 전망이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테라스의 커튼을 열어젖히는 순간, 와~ 게임 끝. 며칠 동안 숙소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가는 듯했다. 그래, 그게 인생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반대로 나쁜 일 후에는 좋은 일이 반드시 따라온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난다.
오늘은 다른 건 하지 말고, 발코니에 앉아 멍을 좀 때려야 할 것 같다. 호수 멍.
커피를 한잔 내려서 다시 발코니에 앉는다.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주변 마을도 조용하다. 레만 호수 저 너머에 몽트뢰도 있고 스위스 로잔도 있겠지. 천천히 여유를 즐기다 아이들이 일어나면 라면도 끓여 먹고, 오후 느지막이 몽트뢰 구경을 나갈까 말까..
한참을 멍 때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일어난다. 아이들도 호수 전망을 보고는 감탄한다. 그럴 수밖에.
앉아서 좀 쉬었더니 기운이 좀 난다. 라면을 먹을까 하다가 급할 것도 없는데 제대로 밥을 좀 해서 아이들을 먹여야겠다 생각했다. 이래 봬도 육아 전선에 몸 담은 지 어언 수년째. 그다지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경험이 이번처럼 아이들과 장기여행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짧은 여행이면 밖에서 다 사 먹겠지만 장기 여행을 하면서 예산상 매번 사 먹을 순 없다. 예산이 넉넉하다고 해도 매 끼니를 나가서 사 먹는 것이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불려둔 쌀로 냄비밥을 하고 즉석식이긴 하지만 가져온 김치찌개 하나를 데운다. 계란말이도 슥슥 하고, 김치를 먹지 않는 워니를 위해서 된장국도 끓인다. 그렇게 차려놓고 보니 진수성찬이다. 창가 옆 식탁에 잘 차려서 밥을 먹는다. 무엇보다 호수 경치가 더할 나위 없는 반찬이 된다.
아이들의 강력한 요구로 오늘은 호수 뷰를 즐기면서 집에서 정비의 시간,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오후 내내 빨래도 하고, 낮잠도 자고, 숙소 앞 뒤 경치도 보면서 호수 멍~
여행 20일 차. 레만 호수. 날씨 맑음.
어제 하루 종일 숙소에서 쉬었더니 몸이 가뿐하다. 컨디션이 좋으니 기분도 좋고, 여행할 의욕도 샘솟는다.
총 40일 전체 여행 일정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걱정했던 것보다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고 있어서 고맙고 대견하다. 집에 가자는 말도 안 하고, 엄마 보고 싶다는 말도 안 하고. 여행 체질인 듯하다.
오늘은 "로이커바트"라고 하는 스위스에서 온천으로 유명한 마을에 가서 노천온천을 하려고 한다. 그간 쌓였던 피로도 풀 겸. 로이커바트까지는 숙소에서 차로 약 1시간 반 거리.
로이커바트 가는 길도 경쾌하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여를 달리고, 그 이후로는 꼬불꼬불 천 길 낭떠러지 산길을 한참 올라간다. 1500m 고지에 위치한 로이커바트를 찾아가는 길이 제법 만만치 않다.
날씨가 좋아서 Gemmi pass에 올라 알프스 경치를 다시 한번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써니가 며칠 전 융프라우에 올랐을 때 산소부족으로 어지럼증을 겪었던 것을 상기하며 그것만은 다시 못하겠다고 해서 포기했다.
로이커바트 테르메 (Leukerbad Therme)라고 하는 온천에서 종일 놀기로 했다. 수영복은 입구에서 대여받았고, 입장료+대여료로 총 100프랑 정도 지불했다.
알아보니 로이커바트에는 크고 유명한 온천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Alpenterme, 또 하나는 Leukerabd Therme이다. 전자는 영유아를 받지 않아 조용하고 고급지고 경치가 조금 더 좋고, 독일식 남녀혼욕 올누드! 사우나가 있다. 후자는 가족단위 이용객이 많고 아이들이 놀기 좋고 워터파크에 있는 워터 슬라이드가 있다. 개인적으로 영유아 없이 조용히 즐길 수 있는 전자(Alpenterme)가 조금 더 끌렸는데, 남녀혼욕 사우나 때문이 아니고! 조용하고 경치가 좋다니까! 입구까지 갔는데, 아.. 카드를 받지 않는단다. 현금이 없어 포기. 근처 ATM기계도 고장이다. 온천측에서 물관리 하는 건가.. 우리 못들어가게 하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쉽지만 후자(Leukerabd Therme)로 갈 수밖에.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생각해서는 후자가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워터 슬라이드에 푹 빠진 아이들은 몇 시간을 따뜻한 수영장에서 놀았고, 덕분에 나는 혼자 조용히 쉴 수 있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을 더 놀다가 딸 뜨고 별 뜨는 거 보고서야 워터파크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내일은 다시 짐 싸서 떠나는 날이다. 레만호의 야경이 내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