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4일 차 (2023년 2월 3일)
여행 24일 차, 엑상 프로방스의 날씨는 아주 맑다.
오늘은 엑상프로방스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뇽을 다녀왔다. 아비뇽이란 이름은 살면서 여러 번 들어 봤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그림의 제목에서 들어봤을 거고, 또 어디서 들었더라... 이소룡의 기합소리 "아비용~" 때문에 많은 들어본 걸로 착각하는 걸까.. (난 영락없는 아재) 아무튼 듣긴 많이 들었어도 직접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비뇽은 과거 교황청이 약 70년간 옮겨와 있던 곳이다.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이 있게 된 이유는 14세기 초 프랑스 왕권이 강화되고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데, 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한다. 카톨릭 신자로서 그 내막이 궁금하기도 하고 비록 오래전이지만, 교황이 머무르셨던 교황청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할 것 같아 아비뇽을 가보기로 한다.
아비뇽으로 가는 길에 "Les Baux-de-provence"란 마을에 들렀다. 돌산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다. 구글에서 주변에 가볼 만한 곳으로 검색했더니 나오길래 가는 길에 한번 들러보기로 한다. 아비뇽에서의 일정이 그리 빡빡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큰 컨셉이 "겨울 여행"인데, 앞에 일정에서도 그랬지만 겨울은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다. 그 이유로 정말 인기 있는 관광지 아니면 대체로 사람이 많지가 않다. 마을을 찾아가는 길도 고즈넉한 시골길이다. 이럴 땐 문득,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내 남은 생애에 이 길을 다시 지나갈 일이 있을까..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착한 마을엔 역시나 여행객이 많지 않다. 간간이 오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정도다. 마을에 사는 주민 분들도 다들 집에만 들어가 계시는지.. 아니면 실제 거주하시는 주민은 없는 여행 테마의 마을인지 알기는 어렵다. 대신 마을 어디를 찍어도 그림엽서가 될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이었다.
다만 어른의 입장에서는 운치가 있고 분위기 있다고 느낄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여기 뭐지?' 할 수 있는 장소라.. 그런 부분이 마음이 조금 쓰이긴 했다. 그런 여행지에 가면, 괜히 내가 액션이 좀 과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 좋지 않니?" 하면서 감동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여행지를 고른 나의 선택이 잘못이 아니었음을 강변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씁쓸함만 남는다. 흑..
마을에 있는 오래되고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큰 도시에 있는 대성당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성당인데, 아주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곳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과거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성당 안에 뭔지 모를 성스러운 기운이 묵직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을 지키는 성곽도 있고, 잘못한 사람들을 가두어 두었던 감옥도 있다.
(이야기 속 이야기)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다녀온 지 2년이 지난 여행을 회상하며 쓰는 글이라 어떤 부분은 기억이 가물하다. 그래서 사진을 보며 그때 그 시간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려야 하는데, 다시 그때의 사진을 들춰보는 재미가 있다. 아이들이 이때만 해도 이렇게 작았었지.. 맞아 그때 우리가 그랬었지.. 하면서. 지금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라 불과 2년의 간격인데 그때와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신기하다.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이 아쉽기도 하고.
마을을 떠나 다시 아비뇽을 찾아 길을 떠났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비뇽에는 교황청이 있다. 1300년데 초기 약 70년간 여기로 옮겨와 있던 교황청에서 모두 7명의 교황님이 계셨던 곳이라 한다. 오래된 건물이긴 하지만, 그 규모에서 과거의 교황청의 영화가 느껴졌달까.. 반면 높은 천장과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 왕권에 밀린, 무너진 권력의 서글픔 같은 분위기도 함께 느껴졌는데, 나만 그런 걸까.
아비뇽 시내를 좀 거닐다가 차를 몰고 숙소로 돌아왔다. 작은 도시에 가면 주차를 어디에 해야 할지, 작은 골목은 차가 다니는 길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다. 오늘도 길을 찾아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지나는 사람들이 곱지 않은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는 걸로 봐서 차로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을 들어간 모양인데.. ㅠ 초행길이라 그 순간 느껴지는 황당함과 부끄럼은 응당 참아내야 하는 '얼굴철판 깔기'는 필수지만, 그래도 성격이 소심하여 그런 상황에 적응이 쉽지는 않다.
여행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지금 여행을 다니는 건지, 원래 일상이 이러했는지 느낌적으로 혼돈이 일어난다. 여행 첫날의 설렘은 조금 옅어진 것 같고, 오래전부터 유럽에 살았던 착각마저 드는데, 먼 훗날에 오늘이 어떻게 회상될까 궁금하다.
내일은 프랑스 휴양도시 니스로 간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