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나를 나답게 해주는 탐구의 여행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이다. 10년의 블랙홀에서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거기에서 벗어나 나만의 우주여행을 시작한 지 20년째인 내게도 그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고 살던 중세시대와 같은 암흑기가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도 전에, 나는 관습과 사회가 정한 틀에 나를 가두었고,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여성이 그러했듯 ‘착한 여자 강박증’에 시달렸다.
자신이 20대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으로서의 직분을 당분간(?) 내려놓겠다는 그 당시 남편의 제안에 한치의 재고 없이 쿨하게 오케이 했던 것은, 진정 그의 꿈을 이해해서도, 내가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어떤 부정도 허용할 수 없었던 꼴난 자존심이었다.
누가 뭐래도 부모에게서 독립한 인생 2챕터를 멋지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집착은 삶의 불편함을 인내로 승화시키는 환상적인 컨버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런 메커니즘은 한시적 착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영화 번역으로 업종 전환을 시작하면서, 삶은 대혼란에 빠졌다.
‘No’라고 말할 수 없던 긴긴 세월 내가 ‘만들어 놓은’ 나의 모습은, 진정 거절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쓰나미처럼 내게 역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 나날이었던가. 예전의 선택은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목놓아 울부짖어봤자 세상은 내 진심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기에 블랙홀을 빠져나오기란 생각보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용돌이를 촉발한 나의 꿈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당시 번역했던 대사이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설 수 있다면 걷고 달릴 수 있다. 영화는 삶의 개연성을 보여주는 가설이자 현실이며, 때로는 내 얘기이고, 로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사랑은 타이밍(Russian Dolls)> 속의 네바강 선상 웨딩 파티는 너무 매혹적이었고, 무모하기까지 한 러시아 여행을 감행하게 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딜 가나 만나는 두 개의 동상, 레닌과 푸시긴. 러시아의 겨울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푸시긴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1년 12개월 중 8개월이 겨울, 영하 40도의 혹한에 시달리며, 그놈의 봄이 올지 안 올지 모르면서, 추위를 견딘 그들에게 푸시긴의 시는 너무나 큰 위로가 됐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여겨지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푸시킨>
그래, 지나간 것은 그게 무엇이든 소중하다. 아픔도 고통도 말이다. 이후에 작업했던 내가 정말 사랑하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말한 ‘진실탐구 법칙(The Physics of the Quest)'도 같은 맥락이다.
다 버리고 떠날 용기만 있다면
안락함도 집착도 뒤로 한 채
진실을 찾아 나선다면
내 몸과 마음에 솔직해진다면
좋건 나쁘건 매 순간이 삶의 의미란 걸 배우고
어깨를 부딪친 모두가 삶의 스승임을 안다면
내 안의 용기를 끌어모아…
아픔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다면
진실은 당신을 비켜 갈 수 없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기 인정, 용기, 솔직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었고, 나를 사랑하기에 세상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은 나를 나답게 만든다.
나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해마다 낯선 곳에 나를 던지면서 그 불편함 속에서 나를 찾는다. 여행 중 가장 하이 되었을 때면, 나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 엽서들은 내가 집에 도착한 한참 후에 도착해서 차곡차곡 쌓여왔고 희미해진 글자만큼 오랜 추억이 된다.
슬픔과 아쉬움과 미움과 아픔을 다 뒤로 하고...
행복한 만큼 더 많이 사랑...
뜨거운 사랑으로 더 열심히...
< 내게 보낸 메시지 중에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별과의 조우는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때로는 우주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기염을 토할 것이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 유성의 파편을 맞아 상처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나와 어깨를 부딪친 사람들, 그들과 주고받은 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지난 세월은 푸시긴이 말했듯이 소중한 것이며, 내 우주여행의 소중한 동력이 된다. 그래서 이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블랙홀을 빠져나와 이 멋진 우주여행에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