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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한 주노씨 May 20. 2018

타르코프스키가 되고 싶었던 이창동

[영화 버닝] 또 하나의 희생, 내 머리도 버닝

버닝은 지금까지 본 최고로 난해한 영화였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The Sacrifice)'과 버금딸림 영화다. 역설적으로 영화 희생과 오버랩되는 느낌이 분명 있어 보이는데 멋진 말로 그 근거를 대진 못하겠다. 왜냐하면 비교대상인 '희생' 자체를 난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마치 비트겐쉬타인 철학처럼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일단 끝까지 보는 것 자체가 고생이고 희생이란 점, 롱테이크가 무지 많다는 점, 라스트씬에 불타는 뭔가가 나온다는 점, 그 불이 신에게 구원받기 위해 인간들이 바친 제물들의 화형식(=a ritual)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희생 외에도 음악과 어두운 조명 때문인가 곡성 느낌도 많이 나고 '마'가 유난히 많이 끼는 대사처리에선 홍상수 영화 느낌도 오버랩됨.


그나마 버닝의 스토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 심어놓은 상징들과 의미들을 알 수가 없어 보는 사람들을 안달나게 한다. 여자주인공이 의미있게 여러번 얘기했던 그레이트 헝거와 리틀 헝거에 모든 답이 다 있어 보인다. 리틀 헝거차원인 우리 사회의 불평등, 부조리, 분노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그 이면에는 그레이트 헝거, 즉 형이상학적 화두인 신(神)과 인간, 구원 등의 어렵고 거창한 타르코프스키급 현학적 아세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벤이 파스타를 요리하면서 말했던 요리와 제물 그리고 신(神)과의 상관관계를 확장시켜 보면 비닐하우스나 여자 역시 그에겐 제물인 듯하다. 모르긴 몰라도 벤은 비닐하우스 대신 해미를 태워 죽였거나 살해 후 먹었을 거라 추측된다. 해미 다음으로 만난 두 번째 여자를 벤이 정성스럽게 메이크업 하는 장면 역시 성스러운 제례의식(=화형식)의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해미의 가족을 만나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종수는 잠시 해미 의심하게 되, 벤의 화장실에서 해미의 시계를 발견+고양이가 살갑게 반응하는 걸 보고 벤에 대한 의심 역시 점점 증폭된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상황들을 일소에 해결하는 계기는 어머니와의 해후다. 16년만에 만난 어머니를 통해 우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종수는 확신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벤을 살해하고 시신과 그의 차량을 불태움(=버닝1)으로써 모든 분노와 빡침(=버닝2)도 함께 태워버리고, 창녀나 옷을 벗는거라 해미를 비난했던 종수 스스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일종의 참회/속죄의식으로 자신의 죄 또한 사해버린다(=버닝3). 석양(=버닝4)과 대마초(=버닝5) 그리고 음악(=영화 '사형대의 엘레베이터' 주제곡인 마일드데이비스의 Generique)에 취해 옷을 벗고 춤췄던 해미가, 여러 버닝의 메타포 속에서 버닝됐던 것처럼...


*커버 사진-제주돌집 탱자싸롱 외관 사진(오른편 ㄷ자형 돌집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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