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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한 주노씨 Oct 26. 2018

길에서 또 다른 길을 보다

김녕월정지질트레일 vs. 산티아고 순례길

억새의 일렁임이 시작됐다. 제주에서 맞는 여섯 번 째 가을이다. 이 곳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한 질문엔 늘 같은 답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되지만, '그래서 행복하냐'라는 질문엔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하게 된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처럼 불안정한 인간이다 보니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무리 멋진 장소라도 삶터가 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일탈의 여행지가 일상의 공간이 되고, 비슷한 하루가 무한 반복되면 다 거기서 거기다. 감각은 무뎌지고 게으름은 증폭된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역마살이 발동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이라 해도 웬만한 곳은 다 보고 가 봐서인지(=been there, done that), 예전 지인들이 찾아오지 않는 한 선뜻 길을 나서기가 쉽지 않다. 몇 번을 망설이다 먼 여행에 대한 갈급증이 극에 달하면 밥벌이를 잠시 접고 1~2년에 한 번, 여행 같은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월급쟁이들 보다는 시간적 여유는 많다 해도 자영업자가 생계를 잠시 접고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나려면 제법 큰 계획과 결심이 필요한 법, 생각 많은 나 같은 강박환자들에겐 여지없이 불안이 엄습한다. 결국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여행하기, 삶의 여행/여행하는 삶의 생활화, 즉 삶과 여행이 만나는 낯선 경계에 의식적으로 나를 몰아넣어야 한다.


경계의 삶은 불안하다. 그렇지만 경계에서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기에 자유롭다. 경계에 서 있으니 어느 쪽도 신경 쓰지 않고 관조할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맞닥뜨리고 어떡해서든 해결할 테니, 경계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추억한다. 말랑해진 머리와 가슴에 꽂히는 영감(=inspiration)과 통찰은 덤이다. 이런 영감과 통찰은 인생을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움을 틔우는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씨앗이 된다.


청소가 일상인 민박업자의 삶. 청소를 마치고 후딱 끼니를 해결한 뒤, 이내 경계로 나선다. 낯설게 하기 ‘레드썬’ 놀이 시~작!

일년 전 오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기념으로 집 근처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을 사뿐이 즈려 밟아 보기로 했다. 올레길보다는 아직 덜 알려진 한라산 둘레길이나 몇 개의 숨은 트래킹 코스가 ‘낯설게 하기’엔 제격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中
까미노의 최종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지난 밤, 음원 사이트에서 모처럼 다운로드 한 낯선 노래들로 휴대폰은 채웠다. 혼자만의 여행에서 음악이 주는 상승효과는 크기 때문이다. 차의 시동, 아니 전원을 켰다. 정숙한 전기차라 그런지 음질도 말쑥하다. 일주도로를 조금만 달김녕 해수욕장에 차를 세웠다. 마치 처음 온 곳인 양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바다 공기를 힘껏 흡입해 본다. 언제든 올 수 있는 동네이니 굳이 한 번에 전 코스를 걸을 이유가 없다. 일단 주차장에서 가까운 바닷길을 따라 고고고~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지도코스

김녕 성세기해변은 동쪽 제주에서 세화해변과 함께 물빛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세기알 포구에서 첫 바다사진 찍기. 이런, 우연히 날아가는 갈매기가 찍혔다. 상서로운 징조다. 예전 등대역할을 했던 도대불과 야외목욕탕이던 청굴물을 지나쳐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줄기에 커다란 암덩어리(?)를 달고 있는 것 같은 독특한 폭낭(=팽나무) 한 그루, 돌담 너머로 잘 정돈된 어느 집의 정원 풍경이 낯선데 정겹다.

세기알 포구
도대불
청굴물
마을 안 폭낭
어느 집 정원

구좌체육관을 지나 호젓한 길로 들어선다. 제주 시골풍경의 전형인 초록색 작물과 검정색 현무암의 강렬한 콘트라스트, 제주 밭담길이 펼쳐진다. 밭담은 현무암으로 대충 쌓아 올린 밭의 경계를 말한다. 제주 어디든 땅을 파거나 밭을 일구다 보면 땅 속에 파묻혀 있던 현무암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이 많은 현무암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 보니 밭의 경계를 따라 듬성듬성 쌓게 되었고, 무덤 주변(=산담)을 둘렀고, 옆집과의 경계(=집담)를 나누곤 했다. 제주 밭담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의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밭담길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주변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도 있다. 화산활동의 결과로 생긴 용암동굴에 지하수가 스며들어 석회동굴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종유석, 석순, 동굴산호 등이 즐비한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마치 짬짜면 같이 용암동굴과 석회동굴의 특징을 한 곳에서 동시에 맛볼 수 있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벵뒤굴, 김녕굴, 만장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중 일반에게 개방된 곳은 만장굴뿐이다. 참고로 올해 거문오름 위쪽에 있는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상류동굴군 (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까지 제주 세계자연유산지역이 확대됐다.

당처물 동굴 위성사진(중앙의 구획화 된 긴 길 아래가 당처물 동굴)
당처물 동굴 지상 부분(=누런 잔디부분)

미개봉 굴인 당처물 동굴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동굴 위 숲 속 나무들의 무수한 뿌리들이 동굴 천장 부분을 뚫고 들어오는데, 이 뿌리를 타고 지하수가 흘러 석회화 되면서 마치 종유석 비가 내리는 듯한 풍광이 가히 환상적인 곳이다. TV에서 당처물 동굴의 위치를 알려 준 위성사진을 캡쳐해 둔 게 있어 네이버 지도를 띄워 비교한 후 똑같은 모양의 지점을 드디어 찾아냈다. 발아래가 당처물 동굴인 건 분명하니, 이제 어딘가에 있을 숨겨진 입구만 찾으면 된다. 주변 빈 농가 창고 안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을까? 아님 저 숲 안에 하수구 뚜껑으로 위장된 지하통로가 있을까? 한 시간 동안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실패!

미개봉 동굴임을 직접 증명하는데 의의를 두고 다시 남은 밭담 길을 걷는다. 낮인데도 인적이 뜸한 곳이라 휴대폰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본다. 북한산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웃도어 아재처럼…


밭담길이 끝나고 다시 제주바다를 만났다. 두 시간 만에 보는 바다인데 마치 까미노 프랑스길을 완주하고 한 달 만에 묵시아(Muxia)에서 바다(=대서양)를 마주쳤을 때처럼 반갑다. 해안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이어폰을 꼽아본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조규찬의 ‘추억’이 일 년 전 감상으로 날 소환한다. 그 때 그 바다를 보며 끄적였던 메모를 꺼내 들어 잠시 시간여행을 떠난다.

스페인  Muxia에서 바라다 본 대서양

‘까미노를 홀로 걸을 때, 가끔 스피커로 음악을 즐겼다. 결코 이어폰을 쓰지 않았다. 걷는데 모든 걸 집중했고 그때 들린 숱한 음들은 한낱 BGM에 불과했다. 뚜벅이 순례를 마치고 이런 저런 바퀴에 몸을 싣고 멍 때리며 시신경에만 신경 쓰는 시간, 그제서야 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접속한다.

음으로만 들리던 파동이 선율로 변조되어 온몸 구석구석 퍼진다. 가사 하나하나가 시가 되어 꽂힌다. 비로소 낯선 풍경이 익숙한 감상에 실려 공감각적 이미지로 치환된다.

눈꺼풀의 무게감이 문득 느껴진다. 슬픈 듯 아련하다. 여행에서 얻는 궁극의 보상은 결국 이런 궁상에서 자주 나왔던 것 같다.’


내일은 오랜 만에 서울에 간다. 제주에 있음 서울이 그립고, 서울에 가면 또 제주가 그립다.

텅빈 하늘길 경계를 날고 있을 때에만 삶의 설렘을 느끼는 난, 둥지 비적응 증후군 말기 환자!


일상의 불안은 삶을 잠식하지만,

경계의 불안은 삶을 장식한다.




PS) 제1회 한국경제신문 여행기 공모전에 낸 글 인데 4위에 입상했네요 ㅋ


*커버사진-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1일차(생장~론세스바예스) 코스인 피레네 산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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