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지만 불편한 자전적 고백 1.
커리어가 살짝 꺾일 나이가 되면 자신이 이 사회에서 주류나 일등이 될 수 없다는 걸 슬슬 깨닫게 된다. 커리어 조로(早老) 현상이 비교적 빠른 광고계에만 쭉 있었던 내 경우엔, 부장을 달고 난 30대 후반쯤인 듯하다. 아직은 그럴듯한 액면 스펙에 연애세포도 왕성하게 살아있지만 내가 더 이상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란 걸 직시하게 되면,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속물근성이라 치부되긴 해도 외모지상주의를 쉽게 포기할 순 없다보니, 보다 영악하게 이성의 외모를 따지게 된다. 가령, 모든 남자들이 빠질만한 연예인급 외모보단 내 눈에 멋져보이는 개성과 세련된 스타일을 지닌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얼굴과 몸매 외에 눈빛, 목소리, 말투, 말솜씨, 취향 등 보다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이성을 바라보게 된다. 가뜩이나 눈을 낮춰도 힘든 마당에, 세상의 흔한 기준에서 벗어나 나만의 기준을 세웠더니 일이 더 꼬여버린다.
경제학 용어 중 '톱니효과'라는게 있다. 소득이 줄어도 소비는 그와 정비례하여 우하향하지 않고 계단식으로 내려간다는 이론이다. 한 마디로 펑펑 쓰던 버릇이 일정기간 유지된다는 건데, 결혼에도 다 때가 있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나이와 눈높이의 괴리현상 때문이다. '눈이 하늘에 달렸다', '분수도 모른채 아직까지도 이상형을 찾는다'란 비난을 받아 본 사람들이 대개 여기에 해당한다. 허우대 멀쩡하고 능력있는 30대 후반부터 40대 싱글 중 이런 분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그 무렵 제주로 홀로 이주한 뒤 6년이 지나 50이 되니,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또 추가된다. 이성에게 어필하기가 쉽지 않단 사실을 직시하기에, 굳이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 자체가 안든다. 그만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보다 독립적으로 나에 대해 알아가는 라이프스타일을 갖게 된다. 다양한 분야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 보니 그리움과 외로움이 예전만큼 힘들지 않다. 어설프게 연애를 시작해서 이런 편안하고 조용한 시간을 방해받을 바엔, 내 눈에 차는, 날 좋아해 주는 이성이 나타날 때까지 이 패턴을 유지하고 싶어진다. 내 눈에 차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날 좋아해야 하는 더 어려운 단계가 남아 있다. 단계별 난이도 역시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지니, 결혼엔 정말 때가 있는 것 같다.
6년만에 이번 설은 가족과 보내기 위해 육지에 간다. '결혼 언제하니?'란 잔소리도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커버사진-구좌읍 세화리 부티크 제주돌집 탱자싸롱 자쿠시 독채 탐라 침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