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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한 주노씨 Sep 02. 2016

게하 주인에게 찾아오는 위기징후들

내일이면 경칩이다. 경험 상 경칩이면 완연한 봄을 느꼈던 걸 보면 전생이 개구리였나 보다.

제주의 겨울 날씨는 정말 가혹하다. 바람 잦아지고 쨍한 날은 일주일에 한 두 번, 나머진 하늘이 꾸물거리던지 바람이 세차다.


그래서인지 겨울엔 제주에 내려온 걸 살짝 후회하면서 우울증 초기에 빠져드는 게 연례 행사다. 날씨로 인한 우울증엔 별다른 처방이 없다. 열 시간이 넘게 잠을 자거나 밀린 TV 프로그램을 다시 보다보면 요통과 손목 터널증후군이 부작용으로 따라온다. 그러다가 햇살이 따스하고 산들바람이 부는 날, 그동안 악화됐던 무기력증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몇일 간 앓은 우울증이 오늘에서야 치유됐다. 손님이 한 명도 없어 댱황했던 바람 찬 그저께 밤, 혼자 지지리 술상을 대하고 있을 땐 정말 당장이라도 제주를 떠나고 싶은 맘이 들었지만, 날씨가 푹해지고 한바탕 운동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난다.


주위에 잘 나가는 게스트하우스 두 세 곳의 주인이 바뀌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번잡한 도시를 털어내고 제주로 와서 게스트들과의 즐거운 어울림을 꿈꾸던 사람들이 결국 3년을 견디지 못하고 업종 전환을 한다. 그들 하나하나를 찾아뵙고 사연을 듣고 싶지만 어느 순간 제주에서의 관계는 자의반 타의반 점점 폐쇄적이 되어 간다.(이 글을 쓰고 1년 후, 나도 결국 게하를 다른 분에게 임대주고 조용한 민박으로 업종 전환함 ㅡㅡ;;)


제주이주자들이 이주 3년차쯤 위기가 온다고 하는데 올해가 딱 3년차다. 위기 직전의 전조 현상을 자가진단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게스트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해 진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불호가 많아지고 호가 줄어든다. 많은 사람을 스쳐보내기에 급급하게 되고 밀도 있는 만남에 대한 기대나 열정이 식어간다.


2) 게을러진다. 매니저와 스태프들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기고 진정한 백수가 되어간다. 개인 시간이 많아진 만큼 취미활동이나 창작활동에 곁을 줘야 하는데 우뇌는 개점휴업 상태다.


3) 인간관계는 좁아진다. 육지 지인들과는 어쩔 수 없이 멀어지겠지만 제주에 와서 알던 지인들과도 점점 왕래가 줄어든다. '내가 먼저 연락하고 다가서야지...'라고 생각하지만 행동으로 잘 옮겨지질 않는다.


4) 여행지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되다보니 제주에 대한 매력이 줄어들면서 행동반경이 작아진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은 많이 있지만 날씨가 추운 겨울엔 선뜻 잘 떠나지지 않는다


답답한 맘에 지난 주 육지를 다녀왔다. 대구로 들어가서 경주와 부산을 찍고 제주로 돌아오려다 비행기값도 비싸고 해서 서울에 잠시 들렀다 제주로 돌아왔다. 몇몇 게스트하우스 묵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벌일 만한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게 작은 수확이지만 서울은 더 많이 내 맘속에서 멀어졌다. 서울행 우울행...


이렇게 계속 궁시렁대면서 부정적인 생각만을 토해냈으면 기승전해피로 끝내야 글이 그럭저럭 마무리 될텐데 가식적인 결론말곤 딱히 답이 보이질 않는다. 그냥 작금의 맘 속 번뇌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밖에...


한 가지 분명한 건, 좋은 짝을 만나는 게 가장 확실한 특효약이란 거... 게스트와 만나 백년가약을 맺은 동네 게하 사장처럼 두 눈 부릅뜨고 더듬이를 바짝 세워보련다.^^


2015년 3월 5일 경칩 전야에...


실로 오랜만에 찾은 경주에서 박해일 코스프레 but 영화는 영화다!

*커버 사진 : 예전 탱자싸롱 게스트하우스가 최근 제주돌집 탱자싸롱 독채형 민박으로 재오픈했습니다. 가성비 좋은 자쿠시 독채탐라와 바비큐 독채한라를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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