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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Feb 12. 2019

부질없는 진실게임

그러니까 누구를 위한 게임인가...

TRUTH? or FALSE?




볕이 반짝반짝 내리쬐는 5월의 어느 날 오후쯤이었다. 그날따라 보스들이 모두 출타하시고 사무실에 딱히 급한 일도 없던 터라 나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며칠 전 다운받아 놓고 여태 시작도 못한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고상한 취미생활 운운하며 되지도 않는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남 보기엔 퍽이나 가소로웠던 모양이다. 이제 겨우 튜토리얼 영상이나 보고 있는데 우리 팀 직원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아직 복사기의 뜨거운 정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사건 기록을 건네더니 “아이고, 변호사님 당장 좀 바쁘시겠네요.”라며 걱정인지 놀림인지 분간이 어려운 말을 내뱉고는 사라졌다.


내 소확행 겸 일탈은 너무나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헛헛한 마음을 잠시 달래고 시선을 옮겨 기록을 보니 체포된 피의자의 구속전피의자심문 이른바 ‘영장실질심사’ 사건이었고, 죄명은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 그러니까 피의자는 속칭 ‘약쟁이’였다.


5월의 풍성한 미세먼지를 한껏 들이키며 니나노 마실을 간 줄 알았던 보스가 어느 틈엔지 사건을 수임한 것이다. 그리고는 원님 없는 동헌에서 사또 노릇이나 하고 있을 이방에게 그만 놀고 따박따박 타 먹은 월급 값을 증명하라 요구한 것이다.


통상, 영장실질심사는 매우 급박하게 진행된다.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체포한 경우 그 때로부터 48시간 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으면 즉시 석방해야 한다. 따라서 체포 후 서둘러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마련이고, 법원 역시 구속영장 청구일 다음 날까지 피의자를 심문해야 하므로 신속하게 심문기일을 지정한다.


그런데, 변호사 입장에서는 피의자의 혐의, 체포 경위나 이유 등 저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피의자의 가족들이 엉엉 울며 찾아오면 그때 비로소 사건을 맡게 된다. 이미 심문기일은 목전에 닥쳐 있지만 변론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으므로 이때부터 변호사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가 되는 것이다.




나 역시도 사건 기록(사실 구속영장청구서 사본 말고는 딱히 기록이랄 것도 없다)을 훑으면서 똥줄이 바삭하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즉시 구금 중인 의뢰인을 만나러 갔다. 깡마른 체구의 의뢰인은 내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잡동사니를 꺼내는 모습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마약 전문변호사이신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응? 아닌데요.”라고 답했다. 대한변호사협회의 규정에 의하면 60가지에 달하는 변호사 전문분야가 있지만 아쉽게도 ‘마약전문’은 없다.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전문분야’는 변호사가 마케팅을 위해 내세우는 광고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정해 놓은 일정 요건 충족 시 변호사가 개인적으로 신청하여 등록하는데, 이때 ‘등록료’라는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도 내야 한다. 그러니까 ‘OO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은 특별히 공인된 명예의 칭호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검증을 거친 광고 카피 정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OO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가졌다한들 그 변호사가 해당 분야에 있어 다른 변호사보다 무조건 실력이 뛰어남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 역시 전문분야 등록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 해서 무조건 다른 변호사보다 전문성이 높다고 자부할 수 없다. 좀 더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변호사가 ‘OO전문’이라는 (유료) 타이틀을 갖는 이유는 ‘OO전문’이라는 문구를 어필해서 해당 분야의 사건 수임 기회가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 즉 광고 효과에 대한 기대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무튼, 내 대답을 들은 의뢰인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으나 일단 나라도 의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른 아침 찾아온 택배기사로부터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건네받는 중에 갑자기 검찰수사관들이 들이닥쳤고, 마약밀수 등의 혐의로 체포하더니 집을 뒤져 몇 가지 물건도 압수해 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의뢰인은 자신이 지금 엄청난 음모에 빠져 너무도 억울하게 잡혀 있으니 당장 풀어달라고 채근했다.


하지만, 의뢰인의 구속영장청구서에 기재된 범죄사실은 의뢰인이 여러 차례 대마를 피우고,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하고,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종 마약도 복용하고, 외국에 있는 딜러로부터 상당량의 마약을 밀수하는 등 중범죄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영장청구서 사본을 보여주며 “말씀하신 거랑 좀 다른데요?”라고 묻자, 의뢰인은 잠깐 눈빛이 흔들리더니 업무상 스트레스가 심해서 우연히 대마를 좀 얻어다가 집에 쟁여놓고 가끔씩 피운 건 사실이지만, 마약 밀수니 신종 마약이니 하는 것은 다 모함이라며, 자신을 못 믿는 거냐고 되물었다.


아니다. 믿는다. 변호사는 무조건 의뢰인 편이니까.


다만, 자초지종을 정확히 알아야 충실한 변론이 가능하므로 자잘한 것까지 굳이 따져 물을 뿐이다.


사건을 받자마자 의뢰인을 만나러 달려가고,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밤새 이러쿵저러쿵 의견서를 써내고, 영장실질심사에도 출석해 피의자에게 구속의 필요성이 없음을 강변해 보았으나, 이미 체포될 때부터 상당량의 마약류 소지와 복용 사실을 자백한 의뢰인은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구속 후, 의뢰인은 몇 차례인가 검찰 조사를 더 받았는데 매번 조사가 끝나고 구치소 접견실에서 나와 만날 때면 노상 옥신각신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의뢰인이 조사 전 내게 해 준 이야기와 검사실에서 짐짓 굳은 표정의 검사에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항상 달랐기 때문이었다.


의뢰인은 처음 검사에게 불려 가기 전, 그저 우연한 기회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마약류를 조금 얻게 되어 호기심에 몇 번 손댔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검사가 내민 모발감정서에는 피의자의 모발에서 대여섯 종의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고, 압수된 컴퓨터 감정서에는 안전한 마약 판매자를 찾기 위한 의뢰인의 피땀 어린 검색 내역이 적나라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첫 조사 후, 뒷덜미가 뻐근해져 있는 나에게 의뢰인은 사는 게 힘들어서 약을 좀 찾다 보니 그렇게 됐다면서 어물쩍거리더니, 하지만 자신은 결코 해외 딜러로부터 마약을 구입해 국내 반입을 시도한 사실이 없고, 수사기관이 신종 마약이라고 지적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합법적인 약물임을 확인 후 구매했다며 자신을 믿어 달라 호소하였다. 물론 믿는다. 변호인이 의뢰인의 말을 안 믿으면 누가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의뢰인의 말이 또 거짓이었음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합법적인 약물이라던 것은 미국, 일본 등 외국에서 이미 수년 전에 마약류로 지정되어 소지, 매매, 사용이 금지된 상태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의뢰인이 체포되기 한참 전부터 임시마약류로 지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사실은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해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금 뒷덜미를 잡은 채 의뢰인을 만나 “선생님, 저한테까지 자꾸 사실과 다른 얘길 하시면 제가 도와드리기가 적잖이 곤란한데 말입니다.”라고 했더니, 의뢰인은 정색을 하며 사실은 그 약물이 자기가 살 때까지만 해도 합법적이었는데 온라인 주문을 해놓고 배송을 기다리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하필 우리 선생님께서 주문한 물건만 배송이 6개월씩 걸려버렸네요.’라고 위로하려다 아무래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더니 의뢰인은 화제를 바꾸어 자신은 외국에서 무슨 택배고 뭐고 시킨 사실이 없는데 검찰이 마약 택배를 배달하는 척 함정을 파놓고 마약밀수범 취급한다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의 택배상자 겉면에는 의뢰인의 영문 이름과 주소가 또박또박 기재되어 있었고, 검사는 의뢰인이 구속된 뒤에도 그의 집으로 마약 택배가 계속 배송되어 검찰직원이 꼬박꼬박 약상자를 대신 받아오는 호의를 베푸는 중이라고 하였다.


늘 뒷덜미만 잡아서 의뢰인에게 별다른 어필을 하지 못한 건가 싶어 이번에는 이마를 짚은 채 의뢰인을 접견하였더니, 그게 사실은 자기가 온라인 마약 거래사이트에서 누군가와 채팅을 하였는데 관심사와 불우한 처지 등이 비슷해 금세 친해졌고, 어느 날 그가 필요하다고 해서 영문 이름과 주소를 가르쳐 주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마약 거래사이트에서 활동하는 누군가가 고가의 마약을 깜짝 선물하려고 의도적으로 우리 고객님에게 접근한 다음,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자 곧바로 시키지도 않은  약상자를 계속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의뢰인이 여러 차례에 걸쳐 특정 배송업체의 해외 배송 기간, 배송 지연 시의 문의처, 자신을 수신자로 한 물건의 배송 현황 등을 검색한 내역이 고스란히 기재된 휴대전화기 감정서가 등장하였고, 함정이라거나 모함이라며 분개하던 의뢰인은 고개를 떨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의뢰인이 그간 꽁꽁 숨겨온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되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비단 형사 사건뿐만 아니라 민사나 가사 등 다른 유형의 사건에서도 변호사와 의뢰인은 종종 끝없는 숨바꼭질을 한다. 물론 술래는 대개 변호사다. 어떤 사건이든 그 상세한 내막을 의뢰인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에 반해 변호사는 관련 정보가 0인 상태에서 의뢰인이 제공하는 정보를 기반으로 차곡차곡 사건을 재구성해 나가는 사람이다. 의뢰인이 어떤 정보를 얼마나, 어떻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변호사의 공격‧방어방법도 달라진다. 그래서 변호사는 의뢰인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고, 의뢰인은 변호사에게 사실을 빠짐없이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뢰인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일단 변호사에게도 숨기고 본다. 숨은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네가 요리조리 잘 살펴서 찾아내라는 식으로 뜬금없이 진실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숨바꼭질은 의뢰인이나 변호사 모두에게 득이 될 것도, 재미날 것도 전혀 없으나 술래가 이기든지 아니면 의뢰인이 제 풀에 지쳐 그만둘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게임이 끝나 숨은 이야기가 밝혀지더라도 의뢰인은 ‘아니, 뭐 그런 것까지 아실 필요가...’ 라거나, ‘그건 이미 다 알고 계실 줄 알았지...’라며 말끝을 흐린다.


굳이 좋게 생각하자면, 의뢰인이 변호사의 일처리가 얼마나 꼼꼼한지 시험해보는 깊은 뜻이 담긴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의뢰인이 무언가 변호사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걸 변호사가 알아서 찾아낸다면, 의뢰인으로부터 ‘어라? 그 녀석 제법인데?’와 비슷한 취지의 칭찬을 들을 테니까.


그러나 변호사와 의뢰인이 ‘미주알고주알 진실 찾기 숨바꼭질’을 벌이는 건 대체로 약점을 감추고 손해를 덜 보려 하는 사람의 본성 때문이다. 의뢰인 입장에서는 자기 체면도 있고 한데 굳이 약점까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가 좀 그렇고, 그냥 자신 있게 밝힐 수 있는 부분만 가지고 변호사가 알아서 잘 구워삶아 승소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큰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변호사는 ‘뭐 그런 것’까지 다 알아야 한다. 남에게 자기 일을 맡기는 사람과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맡아서 해주는 사람 사이에는 숨김이 없어야 일이 성공할 수 있다.


<진실 맞히면 경품 주나요...>




한 20년 전에 배우 전광렬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허준’이 크게 히트를 쳤는데 대사 중에 ‘궁중(宮中)에는 허언(虛言)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이는 서초동 송무 바닥의 현실에도 부합한다. 법정에는 허언이 없다.


사건과 관련하여 당사자나 변호사가 법정에서 한 진술을 다시 주워 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선서한 사람이 허언을 하면 형사처벌도 받는다. 그래서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면, 변호사가 사건의 일면을 전부인 걸로 알고 섣불리 변론에 나선다면, 이는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름지기, 재료가 풍성해야 음식 맛이 제대로 나는 것처럼 변호사가 사건에 관해 미주알고주알 다 꿰고 있어야 논리에 빈틈이 없다. 치밀한 논리는 재판 중 어떤 변수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고 그런 여유는 승소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니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진실게임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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