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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Mar 28. 2019

변호사 불러주세요.

변호사 와도 대신 답해드리지 않아요...




수사물이나 법정 미드 좀 봤다 싶은 사람들한테는 익숙하기도 하고 다소 진부하기도 한 플롯일 텐데...


여기 으리으리한 천조국 부자 동네에 세상 오냐오냐는 혼자 다 받고 자란 철없는 부잣집 아들내미가 있다.


이 친구... 어찌나 구제불능인지 눈만 뜨면 온갖 난봉질과 기행을 일삼는데 그 수준이 우리나라로 치면 놀부 심술 뺨치는 터라, 우는 아이 붙잡아다 쥐어박고, 임산부 배에 돌려차기 하고, 똥 누는 사람 쫓아가 주저앉히고, 멀쩡한 사람 시비 걸어 수염을 뽑아버리는 뭐 그런 망나니 오브 망나니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조사실에 거의 누운 채로 앉아서는 마주 앉은 경찰관의 연봉이나 조롱한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경찰관이 도련님의 눈 앞에 결정적 증거를 슬며시 들이대자 비로소 망나니의 낯빛이 변하더니 다급히 외친다.


변호사 불러주세요. 변호사 올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다.


< 나 한 마디도 안할꺼다잉 >


이윽고 도착한 변호사는 망나니가 경찰관에게 오늘 점심 메뉴 따위를 얘기할 때에도 끼어들어 "제이슨, 그건 얘기하지 말아요."라거나 "제이슨, 그건 내가 설명할게요."라며 거의 피의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망나니 입장에서야 변호사 고놈... 그동안 돈 들인 값 좀 하는구나 싶지만 경찰관이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변호사 고놈... 먹다 버린 포도껍질에서 피어나는 초파리마냥 몹시 성가시고 번거롭다.




미드에나 있을 법한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가능한 이야기다.


피의자는 조사에 앞서 변호사를 불러달라 할 수 있고(다만, 사선변호인이 있을 경우의 얘기다. 우리나라의 피의자 국선변호인 제도는 '형사공공변호인제도'라는 이름으로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변호사가 있건 없건 일체의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이는 피의자의 권리 가운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서 기인하는데, 피의자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가 동석하여 조력하는 일을 변호사 입장에서는 이른바 '조사 입회'(정식으로는 '변호인의 피의자신문 참여')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변호사 조사 입회는 앞에서 본 미드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


이 조사 입회라는 것이 과거 서슬 퍼렇던 시절 자행된(이라고 하기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자행된)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수사기관의 폭언, 구타, 밤샘조사 등 고문과 가혹행위를 근절하고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보니, 실제 조사에 참여한 변호사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우선, 피의자가 애타게 부른 변호사가 와도, 변호사는 경찰관이나 검사의 신문에 피의자 대신 대답할 수 없다.


수사기관의 신문 대상은 피의자이지 변호사가 아니고, 형사사건에서 변호사는 피의자의 '대리인'이 아닌 '변호인' 지위에 있기 때문에 피의자를 대신 혹은 대리하여 답변할 수 없다.


그러니까, 미드나 영화에서처럼 수사기관의 추궁에 눌려 무언가 우물쭈물 털어놓으려는 피의자의 입을 막고 변호사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대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만약 실제로 그랬다간 그 변호사는 수사 방해 등의 이유로 조사실에서 쫓겨난다.


그럼 수사기관이 질문할 때마다 변호사가 피의자더러 이렇게 대답해라, 저렇게 대답해라, 이건 말해라, 저건 말하지 마라 등등 즉석 코치를 하는 건 될까?


물론 안된다.


저런 식으로 즉석 코치하면 그 변호사는 다시금 수사 방해 등의 이유로 조사실에서 쫓겨난다.


변호사는 그저 필요시 수사기관에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을 뿐인데, 당연히 수사기관은 "네~ 네~ 아~ 그러시구나~" 할 뿐, 대체로 귀담아듣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변호사가 조사 전이나 조사 중 휴식시간 등을 이용해 피의자에게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조언'이지 이렇게 진술해라 저렇게 진술해라 식으로 진술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그럼 변호사가 피의자 옆에 찰떡같이 붙어서 수사기관의 일거수일투족을 '저장'하는 건 될까?


역시 안된다.


변호사는 피의자의 기억 환기 등을 위해 조사 내용을 수기로 메모할 수는 있으나 전자기기를 이용해 기록할 수는 없고, 그나마 수기 메모도 제한 없이 허용된 게 불과 얼마 전부터이니 녹음이나 촬영 같은 건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변호사 조사 입회의 가장 큰 쓸모는 신문과정에서의 반말, 욕설, 모욕, 폭행 등 혹시 모를 피의자의 인권침해를 막고, 마치 보호자마냥 그 존재만으로 피의자의 잔뜩 위축된 심리를 안정시키는 데 있다.


그래서, 대체로 변호사들은 조사 입회를 가기가 싫다.


가봐야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거든...


게다가, 변호사는 근본적으로 자기가 가진 시간을 팔아서 먹고사는 존재인지라 가장 귀한 재산 또한 시간인데, 수사기관의 조사는 대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언제 시작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의뢰인이 입회에 투입된 변호사의 시간을 두고 넉넉히 값을 쳐주는 것도 아니다.


입회를 둘러싼 변호사와 의뢰인의 갈등은 이런 한계 때문에 생겨난다.


의뢰인은 조사 입회 변호사가 모든 걸 알아서 해줄 거라 믿지만 실상을 깨닫는 순간 실망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우리 고객님 오봉식 씨(물론 가명이다)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봉식 씨는 온라인 채팅으로 알게 된 여성 B를 추행했다는 내용으로 고소당해 느닷없이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봉식 씨는 그냥 날씨도 좋고 해서 B와 한적한 공터에 앉아 쏘맥이나 몇 잔 말아먹던 중, 갑자기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돼서 서로가 서로를 조물조물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때가 이미 자정을 훨씬 넘긴 야심한 시각이었고, 알고 보니 B는 미성년자였으며, 한적한 공터로 생각했던 곳은 사실 출입이 통제된 공사현장이었다는 것이다.


사건 수임이 늦어진 탓에 부랴부랴 잡동사니를 챙겨 검사실에 올라갔더니 이미 봉식 씨는 검사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울상이 되어 있었고, 아동청소년 범죄 전문이라는 검사는 수사관과 함께 봉식 씨를 잡아먹을 듯이 윽박지르고 있었다.


헌법은 분명 형사피고인의 무죄 추정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데, 수사실무에선 헌법이고 나발이고 피의자 단계부터 유죄가 디폴트(default)인가 보다.


나는 울상이 된 봉식 씨를 화장실로 데려가 달래는 한편, 무언가에 단단히 역정이 난 검사에게 너무 다그치지 말아 달라 사정해가며 한나절을 검사실에서 보냈고, 땅거미가 질 무렵 봉식 씨와 함께 검찰청을 나섰다.


수십 년간 서초동 자리를 지켜온 탓인지 수십 년간 맛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설렁탕집에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아무렇게나 씹어 삼키던 중 봉식 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변호사님 오실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거든요... 변호사님 오시면 다 해결될 줄 았았는데..."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봉식 씨 인중에 달라붙은 파 조각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날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봉식 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괜시리 퍽퍽한 표정으로 두부를 우적거리며 변호사 그거 있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더라는 식의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나는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봉식 씨가 설렁탕 집을 나서기 전에 알려 줄 걸...


'변호사가 와도 대신 답해주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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