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투사는 현실에 없다.
변호사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재판 속 변호사의 모습에 대해 다소간의 환상을 갖고 있다.
보통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출된 재판 장면을 통해 상당한 영향을 받는 듯한데, 뭐 대충 이런 식이다.
누가 봐도 주인공 변호사가 몹시 매우 불리한 사건의 재판이 벌어지고, 상대방 변호사(혹은 검사)는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거의 누은 자세로 의자에 기댄 채 깐죽댄다. 판사는 판사대로 상대방 편에 딱 붙어서 아 글쎄 결정적 증거를 내놓으라며 주인공을 채근하고, 방청객들은 주인공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술렁거린다.
도대체 탈출구가 없을 것 같은 이 숨 막히는 장면에서, 갑자기 주인공이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러더니, 법정 구석구석을 돌며 사건의 쟁점과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왜인지 방청객 모두가 엉엉 울며 수긍하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고,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던 증인에게는 단지 정의의 이름으로 호통을 쳤을 뿐인데 곧장 진실이 쏟아져 나오며, 아까부터 깐죽대던 상대방에게는 전에 없던 빈틈이 갑자기 생겨나 주인공의 유려한 언변에 무릎을 꿇고 만다.
상황이 이쯤 되면 판사는 별다른 증거가 없긴 하지만 어쩐지 주인공의 열정적인 변론에 감탄해 손을 들어주고, 선량하지만 말 못 할 사연으로 세상 억울했던 의뢰인은 어느새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며, 쿨하게 돌아서 법정을 나가는 주인공의 뒤통수에 연신 꾸벅거린다.
게다가,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은 돈 없고 백 없는 흙수저지만 신묘한 통찰력을 가진 주인공이 계획한 대로다.
와 세상 훈훈하다. 이 정도면 진짜 변호사 해 먹을 만하겠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은 없다.
판사가 막강한 지휘권을 갖는 소송에서 변호사는 '을 of 을', '병 of 병' 이다. 변호사가 법정에서 책상을 쾅쾅 쳐대고, 누군지도 모르는 방청객을 상대로 홀연히 일장 연설을 시전 하고, 더 나아가 상대방과 판사까지 가르쳐가며 좌중을 압도하는 그런 장면은 결코 볼 수 없다.
'이의 있습니다' 같은 옛날 사람 멘트도 쓰지 않고, 혹여 '존경하는 재판장님' 같은 되지도 않는 소리로 운을 떼면 재판장이 코웃음을 치며 '존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로 맞받아칠 것이며, 법정 여기저기를 정신 사납게 쏘다니는 미드급 액션을 선보이더라도 곧장 '앉아서 변론하세요.'로 제지당한다.
재판의 승기는 증거가 좌우하는지라, 변호사가 말발로 좌중의 눈물 콧물을 쏙 빼놓더라도 결국 증거 없이는 드라마틱한 판결이 나오기 어렵고, 증인을 비롯한 증거의 신청과 조사 역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하므로, 어느 날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증인이 법정 문을 박차고 들어와 작심한 듯 결정적 증언을 내뱉는 일은 현실에는 좀처럼 없다.
오히려, 현실 속 재판 특히 민사 재판은 매우 기계적이고 매우 따분하고 의외로 매우 빨리 끝나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는 변론할 사항, 앞으로 진행할 사항 등을 적은 서면을 이미 제출한 상태로 재판에 임하고, 상대방이나 판사 역시 그 서면을 먼저 읽고 재판에 임하므로, 정작 재판 당일에는 피차 구두로 주절주절 길게 할 말이 없다.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 사건 관계인이 많은 경우, 증인 신문이 진행되는 경우 등이 아니라면, 보통의 재판은 10분 내로 끝난다. 빠르면 1분도 안 걸려 마칠 때도 있다. 실제로 법원의 재판 스케줄 또한 1건당 짧으면 5분, 길어야 15분 정도가 배정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TV 속 재판 모습을 상상하며 쫄래쫄래 재판을 따라온 우리 고갱님은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노잼 재판에 적잖이 실망하곤 한다.
사건번호가 호명되고, 변호사가 앞에 나가 앉길래 이제 뭔가 흥미진진한 장면이 펼쳐지는가 했는데, 판사랑 상대방이랑 지들끼리 몇 마디 쑥덕쑥덕하고는 바로 다음 재판기일 잡고 '자, 그럼 돌아가세요.'가 되니 뭐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와 달리 변호사가 법정에서 쓸데없이 언성 높여 싸워대는 투사적 면모를 보이는 것이 의뢰인 보기엔 속 시원할지 몰라도, 실리에 있어서는 결코 좋을 게 없다.
사건이란 언제 어떻게 변모할지 알 수 없는 거라서 지금은 일방적으로 유리해도 나중엔 말도 안 되게 불리해질 수도 있는데, 신나게 나 홀로 투사를 시전 하다가 그때쯤 자세를 낮춰 본들 아무도 내 편 들어주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는 시청자의 말초신경을 쫄깃하게 자극할 필요가 있으니 극단적으로 이례적인 경우를 연출한 것일 뿐이고, 현실의 재판이란 처음부터 재밌자고 하는 게 아니라서 무조건 재미없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왕 쫄래쫄래 방청하러 오는 거라면 마음을 비우고 오는 게 좋다. 그러면 뭐 재미는 없어도 생각 외로 일찍 끝나서 왠지 시간 벌었다는 느낌은 받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