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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Jul 24. 2019

한솥밥 식구의 가족 같은 회식

우리가 남이가.



이 땅의 회식은 대체로 쓸데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서초동 바닥에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심심찮게 회식이 생기지만 십중팔구는 몹시 쓸모가 없다.


인심 좋게 오가는 건 술잔뿐인데 여기에는 술뿐만이 아니라 영혼 없는 리액션, 하나마나한 잡담, 다분히 전략적인 딸랑딸랑, 물고 물리는 허세와 자랑 따위가 가득 채워져 있다. 


매번 '한솥밥 먹는 식구'끼리 친목을 도모한다거나, 지위고하를 떠나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식상한 타이틀을 내걸고 개최되지만, 이 바닥의 현실은 엄연히 네 솥과 내 솥이 나뉘어 있고, 직위, 경력, 연배 등에 따른 피라미드식 서열 질서를 삭제하면 모두가 옆집 아줌마, 아저씨에 불과한 이 곳에서, 인터넷으로 배운 건배사나 외치고 다 함께 와르르 박수나 치는 회식이 어떻게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한 가족으로 령도 하신다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몹시 어렵고 불편하고 번거롭고 뭐 그렇고 그런 점심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신입 소속변호사부터 대표변호사까지 두루두루 참석하는 일종의 점심 회식 같은 건데 일단 자리의 성격 자체만으로도 나 같은 말단+반골은 불편하다. 


어차피 그 자리에서 내가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주도할 입장도 아니니 그저 밥그릇에 고개 박고 꾸역꾸역 먹다가 눈치껏 아무 리액션이나 던지고 말아야지 하고 있는데, 하필 오늘따라 어르신들 오가는 말씀이 안 그래도 배배 꼬인 내 심기엔 퍽이나 터무니없었다.


꾸덕꾸덕하게 말라있던 입안에 어느 정도 술기운이 돌고 나니, 자식 둔 부모들의 대화가 늘 그렇듯이 이번에 누구누구의 아들 딸내미가 신림동 국립대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는데, 처음에야 "아이고 대단하시네 축하드립니다."와 같은 교과서적인 멘트가 구름처럼 떠다녔지만 이후 한 마디씩 더해지는 주변 사람들의 말은 차츰 경쟁적인 자식 자랑으로 변모한다.


갑 : "아니 근데 그 집 아드님이 OO외고 나오셨다면서요 허허 우리 작은 애도 이번에 거기 들어갔는데 곧 신림동에서 둘이 만나겠습니다?  아 참 우리 큰 애는 △△외고 3학년이구요. 으핫핫핫."


을 : "아 거 OO외고 역사를 만든 1회가 우리 딸내미요 허허 지지배가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대학을 누욕으로 가버려서 내가 그거 학비 대느라 피똥 쌌습니다."


병 : "아유 선배님들 저희 애는 이번에 ㅁㅁ국제중에 들어갔는데 여기 나와서 OO외고 거쳐 신림동 국립대 가는 거는 요즘 기본 코스라고 하더라고요. 먼저 가신 분들이 길 좀 잘 닦아주십시오. 하하하"


그러니까 저 말들은 결국, '내 새끼가 이 바닥 끝판왕이니까 니들은 우쭐대지 말고 어서 빨리 나를 몹시 부러워해라'는 걸 매우 점잖게 표출한 건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심함을 꾹꾹 누르며 "'우와 우와"를 연발하다 나중에는 소리를 내는 것마저도 귀찮아져 입만 뻐끔거리는 립싱크로 대신했다.


그럼에도 모처럼 시작된 자랑 릴레이는 80년대 올림픽 탁구마냥 끝없이 핑퐁질을 해댔고, 당시 식탁에 대자로 누워있던 고등어의 고소한 기름내는 어느새 차가운 비린내로 바뀌어갔으며,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던 나는 하염없이 생선 눈알만 쳐다보았다.


어차피 무자식 상팔자인 나는 이미 '아들딸'을 경주마로 삼은 그들만의 레이스에서 이탈한 지 오래라 대화에 끼어들 것도,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전혀 없었지만, 어쩐지 드라마 SKY캐슬(무려 '입시스릴러'라는 대단히 신박한 컨셉을 표방하고 있다)로 대박을 친 제작진의 빛나는 통찰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그들만의 레이스'를 겪어 보진 못한 사람이 일견 하기에 저 드라마는 몹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최소 10년 이상 큰 집 살며 콩밥을 오도독 오도독 씹어 잡수셔야 할 중범죄(극 중 입시카운셀러 선생님과 예서 학생 모친께서는 살인, 뇌물, 업무방해, 강요, 폭행, 협박 등 형법전에 등장하는 어지간한 죄들을 편식 없이 골고루 범하는 기염을 토하셨다)를 코 후비듯 가볍게 실행하시는 분들이 그 정성으로 목표한 바가 고작 자식새끼 서울 의대 입학이라는 점이 나는 너무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이 땅의 부모 마음을 단칼에 꿰뚫은 제작진의 깊고 깊은 통찰력을 우매한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였다.


한바탕 자랑질 탁구가 이어진 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회식은 더욱 쓸모없는 허세질 레이스로 막판 활기를 띄우는데, 이를테면 누군가가 이번에 새로 오픈한 회원제 골프장에 갔는데 잔디가 좋아서 그런지 드라이버가 스치기만 해도 공이 300을 날아갔다는 얘길 하자, 마주 앉은 사람이 질세라 자기가 얼마 전 외국 출장길에 비바람을 뚫고 골프를 쳤는데 한방에 홀컵을 관통해서 돼지머리 올려놓고 절을 몇 번을 했다는 둥 뭐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잔디 덕에 스쳐도 300인 분이나 외국 출장길에 비바람을 뚫고 기어이 돼지머리를 사 오신 분이나 모두 이 세상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식구의 화목함이라든가, 가족의 유대 같은 거창한 주제와는 1도 관계없이 누군가의 입에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반복되고, 누군가의 입에서는 아직도 태산같이 남은 허세가 쏟아지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벽으로 촘촘히 구분되었던 회식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 "조만간 또 식사들 같이 하십시다."라는 멘트와 함께 끝이 났다.


하지만 "조만간"이라고 해봤자 언제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조만간' 다시 모이는 걸 아무도 원치 않으며,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모두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다음에는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만, 일터에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몹시 어색하고 뻘쭘한 사이로 돌아간다.


대학생 시절, 어느 회사의 인턴으로 잠시 근무했는데 어느 날인가 오늘과 비슷한 류의 회식이 벌어졌고, 나는 마음 편히 먹고 싶은 거 많이 먹으라는 부장님 지시를 충실히 따라 말없이, 하지만 빠른 속도로 접시들을 싹싹 비우고 있었다.


그때, 어느 선배 한 명이 내 뒤통수에 대고 지리도록 통렬한 한 마디를 던지고 갔는데 옷깃에라도 적어놓고 두고두고 새겨야 할 명언이라 생각한다.


"야, 정신 차리고 외근 똑바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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