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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변호사 Feb 07. 2019

여사님의 껌 값

그래도 저는 고객님 편입니다만...




오전 느지막한 시간에 사무실에 들어섰더니 우리 팀 스텝이 왜 이제야 오냐며 화색이 되어 반긴다. 만날 보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저리 반가울 리 없는데 뭔가 수상하다. 오늘이 월급날인가 잠시 생각하다 아직 통장에 월급님 다녀가신 온기가 남아 있어 “아직 며칠 남지 않았어요?”라고 했더니 “뭐가요? K씨 아까부터 오셔서 기다리고 계세요.”라는 말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아 그거였구나, 어쩐지 반기더라니...


우리 고객님 K여사는 꽤나 딱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부모 밑에 8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친 뒤에는 더 이상 거머리가 득실대는 남의 논 허드렛일이 하기 싫어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 그 후로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떠돌며 재봉질하는 공순이가 되었다가, 역전 다방 미쓰김도 되어 보고, 곰팡내 가득한 지하 주점에서 메리인지 세리인지 아무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술도 따르며 닥치는 대로 살았다. 그때가 무려 30여년 전이니 나이 어린 여성이 혼자 살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환경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 남보다 곱절은 팍팍한 일상을 견뎌서인지 외로움 또한 곱절로 커서 바람처럼 가벼운 남자라도 그저 좋은 사람이려니 믿고 결혼도 두어번인가 하였지만 역시나 바람처럼 떠나버렸다. 이래저래 지지리 복 없는 년이라 자책하며 이제 남편 따위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하고 살았건만, K여사의 나이가 쉰을 넘어 만난 지금의 남편은 짐짓 성실해보였고 그동안의 뜨내기 잡놈들과는 무언가 달라 보여 다 늦은 나이에 다시 한 번 백년의 가약을 맺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사님 입버릇마냥 그녀는 정말 ‘지나치게 행운이 없는 여성’이었는지, 늦게 만난 남편은 결혼 후 3달 만에 근면성실 컨셉을 깨끗이 접고 사업이다 뭐다는 핑계로 K여사의 피땀 같은 돈을 게 눈 감추듯 갉아먹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매일 돈, 돈하며 K여사를 볶아대거나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소주병만 불어대니 참다못한 K여사는 결혼 2년만에 이혼소송을 결심하였고, 어찌어찌 흘러들어 나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더럽게 운 없는 중년 여성의 인생 드라마였던지라, 나는 K여사의 지난한 삶에 거의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그런데 모든 걸 내던진 채 독기만 품은 K여사는 자신의 기구한 삶 대신 이제 막 시작한 소송을 인생 드라마로 만들고자 결심하였고, 이때부터는 내 일상이 기구해지기 시작했다.




통상, 이혼소송을 제기하면 단순히 이혼만 청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부부가 혼인생활 중 공동으로 형성한 재산을 분할해달라는 청구(재산분할청구), 상대방의 잘못으로 혼인이 파탄에 이르러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청구(위자료청구)가 더해진다. 그런데 재산분할은 어디까지나 부부가 혼인 중 공동의 노력으로 형성, 유지, 증식한 재산이 실재(實在)할 때 가능하다. 위자료 또한 K여사가 느낀 정신적 고통을 스스로 계량해서 그 억울한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질 만큼의 금액을 책정하면 좋겠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판사가 혼인파탄의 귀책 등 당사자 간의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른바 ‘적정 수준’에서 책정할 뿐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산란기 까치복만큼이나 독기를 가득 품은 K여사가 저까짓 원론적인 설명에 쉬이 수긍할 리 없었다. 내가 볼 때 K여사의 남편은 방울 두 쪽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K여사는 자신이 혼인생활 중 경험한 마음 속 천불의 화끈함을 끝없이 내게 알려주며 위자료 3억원 정도는 껌 값이라고 했다. 여사님 잡수시는 껌 한 쪽 사려면 나는 10년간 숨만 쉬며 돈을 모아도 모자라겠다고 짐짓 농지거리를 떨어도 K여사의 껌 값은 에누리가 없었다.


오히려, K여사는 ‘그저 처먹고 싸 재끼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모질이 놈’ 먹여 살리느라 부부의 재산이라고는 수저 한 벌밖에 남지 않았으니 대신 시부모의 집이라도 나눠가져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남편 얘기를 할 때마다 분기탱천하여 허공을 가르는 K여사의 주먹이 어쩌면 나에게 향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아이고, 여사님 고정하시고...”를 연발하며 주저리주저리 위로도 해보았건만 소용없었다. K여사는 기어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편을 복날 개처럼 때려잡아서는 신혼 첫날 사다 먹인 박카스 한 통까지 게워내게 만들 기세였다.


사실, K여사뿐만 아니라 변호사를 찾는 의뢰인들의 대부분은 이미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무조건 상대방을 박살낼 방법만을 찾는다. 금전청구의 경우 내가 보기엔 그야말로 인용될 가능성이 극히 낮은 터무니없는 수준임에도 잔뜩 분노해있는 의뢰인에게는 그 나름의 계산에다가 지금껏 받은 ‘정신적 고통’을 더한 것으로 지극히 정당한 수준이 된다. 혹은 되든 안 되든 거액의 돈을 요구함으로써 상대방에게 한방 먹인다고 생각하는지, 일단 거액을 청구해 놓아야만 자신이 다소간의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하지만, 소송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흔히 얘기하듯 '법대로' 하자면 더욱 그렇다. 여기서 법리적인 썰을 풀어가며 잘난 척 할 것도 없이 그동안 내가 이 바닥을 굴러다니며 경험해 본 수백건의 소송이 모두 그러했다


특히나, 이혼 위자료 내지 재산분할 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가 에누리 없이 그대로 인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원고는 거액의 금전을 청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변호사보수와 인지 등 소송비용도 많이 부담해야 하고, 일부라도 패소할 경우 그 부분에 해당하는 청구 금액을 받지 못함은 물론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물어내야 한다.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원고의 비현실적인 청구를 자신에 대한 거친 공격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적반하장 격이 되어 이판사판 막장 싸움을 걸어온다. 여기에다가 K여사의 경우처럼 상대방이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 신세라면 원고는 일부 승소한 부분에 관해서조차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하고, 그 판결문은 오랜 시간 비싼 돈 들여 얻은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원고는 섣불리 과다한 금전청구를 했다가 오히려 안 봐도 될 손해를 보게 될 수 있고, 이겨도 이긴 게 아닌 허망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취지에서, K여사가 나름의 셈법으로 책정한 위자료가 왜 과다한지, 시부모의 집을 분할하여 갖겠다는 청구가 어째서 불가능한지, 쥐뿔도 없는 남편의 방울 한 쪽이라도 떼어달라는 요구는 또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등을 최선을 다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K여사는 자신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마련해온 각종 요구사항에 관해, 이건 이래서 어렵고 저건 저래서 어렵다고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대는 변호사가 퍽이나 마뜩찮았던 것 같다. 그녀는 돌연 “아니, 그럼 변호사님은 대체 누구 편이신거에요?”라고 날을 세우며 눈을 부릅떴다.


어린 시절 삼국지 덕후였던 나는 소설 삼국지를 수십번씩 읽었는데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고...”라는 대목에 이르면 늘 ‘고리눈’이 대체 무엇인지 의아해하곤 했다. 그런데 이 날 K여사의 눈을 보고 나는 비로소 ‘고리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 편이겠는가, 당연히 수임료를 지불한 고객님 편이다. 글로 배운 고리눈의 실사판을 보고 약간 움찔하긴 했지만 그래도 뻔한 물음에는 뻔한 대답이 정답인지라 “저는 여사님 편이죠.”라고 했더니 그게 또 맘에 안 들었나보다. K여사는 쥐방울만한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책상을 탕탕 치더니 “그럼 대체 할 수 있는 게 뭐에요?”라거나, “안 되는 걸 되게 해주는 게 변호사 아니에요? 그렇게 얘기할 거 같으면 제가 변호사 안 샀죠.”라며 내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표시한다.


응, 아니다. 변호사는 안 되는 걸 되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가인 선생(김병로,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께서 변호사로 부활하신들 안 되는 걸 되게 해줄 수는 없다. 내가 변호사라서 안 되는 걸 되게 해줄 수 있었다면 나는 진작 만수르 뺨치게 돈을 벌었을 거고, 진작 은퇴해서 1년 365일 만수르 세트나 쏘며 한량으로 살았을 거다.


그럼 대체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변호사는 차라리 될 만한 걸 쉽고, 빠르고, 확실하게 해주는 사람에 가깝다. 


첫 만남부터 내 직업의 존재 의의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받고 적잖이 자괴감이 들었으나, K여사를 비롯한 고객님들이 있어 오늘도 어찌어찌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K여사에게 “여사님, 전부 안 된다, 못 한다 소리가 아니구요.”부터 시작해서 ‘이건 이래서 안될 것 같고, 저건 저래서 어려울 것 같고, 여차저차한 방향이 실리 면에서 가장 유리할 것 같지만, 그래도 처음 생각하신 청구를 관철하시겠다면 그 역시 아예 불가능이라 단정할 수는 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진행해드리겠다.’고 한참을 주절주절 하였더니, K여사는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퉁명스런 말투로 생각 좀 해보고 오겠다며 돌아갔다.


< 나도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옥신각신했던 첫 만남 이후, K여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내가 이 바닥 생활을 하면서 그나마 좋았던 게 출근시간에 별로 제약이 없다는 점이었는데, K여사가 찾아오면서부터 나는 직장 생활의 큰 장점을 잃었고, 대신 부질없는 영광을 하나 얻었다. 웬만한 세상풍파 따위 악으로 깡으로 쪼개며 살아온 인생 만렙의 K여사는 어찌나 부지런한지 항상 사무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찾아 왔고, 매번 고객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었던 나는 뜻밖에 출근 1등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내 인생에 뭐든지 앞에서 1등하는 경우는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이걸로 숙원도 하나 푼 셈이다. 


매일같이 찾아와서 무슨 말을 그리 많이 했을까 싶지만, 초반에는 대체로 첫 만남 때 했던 위자료 청구의 당부나 재산분할 청구의 가부 등에 관한 조언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음악은 1도 모르는 문외한, 까막눈이지만 어쩐지 도돌이표가 잔뜩 들어간 곡을 연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반 이후에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소송의 핵심에서 벗어나 일상에 관한 수다가 주를 이루었고, 잔뜩 신이 난 K여사는 늘 새로운 레퍼토리와 함께 남편의 못난 점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나는 어쩐지 시청자와 같은 입장에서 ‘K의 삶’과 ‘못돼먹은 그 놈’을 다룬 일일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었는데 흡입력이 대단해서 항상 주인공(물론, K여사다)이 꼭 복수하길 바랐다.


그 날도 K여사는 나를 보자마자 특유의 구성진 말투로 남편의 악행, 시부모의 배신, 세상의 부조리, 한국 사회의 구태 등을 깨알같이 쏟아내었는데, 나는 소 제기를 예정하면서도 아직 기본적인 방향조차 결정되지 않은 이 상황이 문득 초조해져 “여사님, 이제 방향을 결정하실까요? 위자료 청구랑 재산분할 청구 부분 이렇게 정리하실 건가요?”라고 선을 그어 물었다. 그러자 K여사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아유... 난 몰라요. 변호사님이 알아서 잘 해주세요.”라며 도리어 공을 넘겼다.


변호사는 대리인이다. '남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변호사가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 일을 하면 곤란하다. 적어도 사건 진행의 기본 방향은 의뢰인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 변호사는 다만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조언해주고 의뢰인의 결정대로 그의 일을 해주는 역할일 뿐이다. 의뢰인 입장에서도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스스로 결정해야 나중에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런 얘기를 해주며 이미 충분히 조언을 드렸으니 궁극적인 선택은 본인 몫이라고 하자, K여사는 “아니, 뭐 못하신다고만 하시고... 저 보고 하라고만 하시고...”라며 볼멘소리를 조금 하다 이내 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이후, K여사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여사님 성격이라면 다른 변호사를 찾아가 당초 원했던 대로 소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출근 꼴찌의 고즈넉한 삶을 되찾았지만 무언가 마음이 헛헛해졌다. 어떻든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아온 K여사에게 ‘안 된다’, ‘어렵다’ 소리 좀 적당히 하고 ‘될 것 같다’, ‘되도록 해보자’는 식으로 좋게 얘기해줄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렇지만 고객들에게 매양 밝고 희망적인 말만 해줄 수는 없다. 고깝게 들릴지언정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 가장 실리 추구에 근접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변호사의 중임이다. 내가 심각한 비관론자이고 안전제일주의자인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근거 없는 낙관보다는 감수된 비관이 덜 위험하고 감언(甘言) 보다는 고언(苦言)이 이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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