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생계형변호사 Oct 22. 2019

미쓰 리의 오빠 생각

그 오빠는 이제 그 오빠가 아니야.



"아 저 양아치들 진짜.. 아니 저래도 돼요? 저렇게 대놓고 막 위증하면 구속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높고 구름 없이 공활한 하늘이 딱 좋던 가을 어느 날이었건만, 법원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미쓰 리는 원고와 원고 대리인을 개자녀, 소자녀 등으로 칭하며 참았던 성토를 쏟아냈다.


평소에도 괄괄한 성격 유감없이 뽐내고 다니던 다혈질의 미쓰 리이긴 했지만, 저 날 귀가 따끔할 정도로 날 선 성토를 퍼붓는 까닭은 모처럼 구경 한 번 하자며 찾은 현실 속 재판이란 게 그가 파자마 바람으로 숱하게 체험했던 TV 속 재판과는 영 딴 판이었기 때문일 거다.


우리 고갱님 미쓰 리는 젊은 시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화류계에 몸담았던 선수였는데, 재능인지 노력인지 아무튼 나름대로 인기도 많고 잘 나가서 이 가게, 저 가게 스카웃 제의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슬슬 나이가 들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가 되니 은퇴자의 삶을 꾸리겠다며 자기 가게를 열기로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놈의 돈이 문제인지라 부족한 오픈 비용을 어디서 마련할지 전전긍긍하던 중, 일본에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오빠'라는 사람이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 했고, '우리 사이'에 이자 그까이꺼 적당히 성의 표시만 해서 형편 되는 대로 갚으라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어 냉큼 그러마하고 돈을 타 왔단다.


하지만, 은퇴 후 퇴직금 털어 치킨집 오픈한 사람 10명 중 8, 9명은 치킨 본부 배만 불리고 망한다는 속설처럼 미쓰 리 역시 가게 하나 시원하게 말아드셨다.


속상한 마음을 말로 풀자면 3박 4일도 모자랐을 테지만 그럴 여유 부리기엔 이리저리 꿔다 쓴 돈이 많았으므로, 가게에 놓았던 중고 위스키 글라스까지 몽땅 처분하여 우선 '친한 오빠'의 돈부터 갚아주었는데, 이 오빠가 갑자기 변덕을 부렸다.


그동안 밀린 이자가 원금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라며, 겨드랑이에 일수가방 하나 꿰찬 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빚 독촉을 하더라는 것이다.


쫄딱 망해서 딸내미 기저귀 살 돈도 마땅찮은 처지였던 미쓰 리는 '친한 오빠'가 취하고 있는 작금의 행태가 '우리 사이'에 비추어 몹시 적절치 않다는 취지로 수차 개선을 촉구하였지만, 오빠는 그저 콧방귀나 붕붕 뿜어내더니 어느 날 밤 험상궂은 얼굴의 삼촌과 함께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와 미쓰 리를 불러냈고, 얘기나 하자며 데려간 인적 드문 야산 중턱에서 연 49% 이자율이 명시된 대부계약서를 들이밀었다(당시에는 대부업자가 연 49%의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오빠는 옛날에 다 약속했던 내용이니 좋게 좋게 가자며 어서 서명하라 채근했고, 미쓰 리는 우리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며 울분을 토했으나 그럴수록 오빠의 표정은 점점 구겨졌으며, '(주)똘똘이 캐피탈 본부장'이라 새겨진 명함에도 불구하고 분명 본업은 따로 있을 것처럼 생긴 삼촌은 연신 차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넣었다 부산을 떨었다.


자칫하면 그날 밤, 예정에도 없이 마대자루를 침낭 삼아 야산 중턱 양지바른 구덩이 속에서 숙면을 취하게 될까 덜컥 겁이 났던 미쓰 리는 결국 사인을 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미쓰 리는 이미 갚을 거 다 갚은 마당에 한밤 중 끌려가서 마지못해 써주고 온 그깟 종이 쪼가리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연히 돈도 더 이상 갚지 않았다.


오빠의 대응은 미쓰 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적절했다. 그는 더 이상 일수가방 꿰차고 미쓰 리를 찾아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대신 똘똘이 본부장이랑 어울려 다니며 어느 틈 엔지 변호사까지 사서 '대여금 청구의 소'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적힌 소장을 보내주었다


그 오빠는 이제 미쓰 리가 알던 그 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 사이' 따위 진작 개나 줘버리고 일수꾼 양아치로 변신해있었으나 미쓰 리만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 자신이 믿는 '진실'이 아주 쉽게, 그리고 당연히 밝혀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의는 언제나 이긴다.'라든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 따위의 맹랑한 허튼소리만 믿고 재판에 임하면 언제나, 반드시 패하고, 그때까지 믿었던 진실은 순식간에 거짓으로 둔갑한다.


재판에서는 증거로 말하는 게 원칙이다. 제 아무리 정의고, 진실이고, 나발이고 간에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 사실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친한 오빠와 똘똘이 본부장이 미쓰 리를 야산 중턱으로 유인해 기어코 서명토록 한 금전소비대차계약서가 무효임을 법정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판사는 "그래서 강박에 의한 계약임을 입증할 자료는 어떤 게 있나요?"라고 되물을 뿐이다.


일단 계약서에 당사자가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으면 그로써 계약은 효력을 갖게 된다. 즉, 그 계약서는 당사자가 진정한 의사로 서명 내지 날인한 걸로 추정되고, 그 계약은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에 따라 성립한 걸로 추정된다(이를 가리켜 이 바닥에서는 '2단의 추정'이라고 어렵게 부른다).


이러한 추정이 복멸 되려면 저 도장이 내 것이 아니라거나, 내 도장이 맞긴 하는데 누가 훔쳐다 멋대로 찍은 것이라거나, 아니면 내 도장을 내가 찍은 게 맞지만 죽일 듯이 협박,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등의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쓰 리가 스스로 계약서에 서명한 사실은 객관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없는 반면 강박을 당했다는 사실은 도대체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구구절절한 협박 편지도, 문자메시지도, 전화나 대화 녹음도, 계약 체결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도, 우연히 야산을 오르다 중턱에 세워진 차량 속을 똑똑히 쳐다본 운 좋은 등산객조차도 무엇 하나 손에 쥔 것 없는 미쓰 리에게, 그 날의 진실이 자연히 밝혀질 가능성이란 옹알이나 겨우 하던 젖먹이가 하루아침에 시국 논평을 늘어놓을 가능성 보다도 낮았다.


게다가, 이런 사정을 진작 눈치챈 오빠와 그 대리인은 기세 등등하여 미쓰 리가 한 마디 할 때마다 한 숨 가득 실소와 함께 끼어들어 판사에게 피고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님을 고함으로써 미쓰 리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거칠게 표현했을 때, 쌍방 당사자의 입장에서 재판이란 속고 속이는 싸움의 연속 즉, 누가 더 판사를 잘 속이는가를 두고 벌이는 레이스와도 같아서 거짓말임이 명백히 탄로날만 한 증거가 없다면 거짓말도 참말인 것처럼 쏟아 낼 수 있고, 증인도 아닌 재판의 당사자가 거짓말을 했다 한들 위증죄로 처벌되지도 않기 때문에 승기를 선점하려는 당사자는 있는 말 없는 말 가리지 않고 일단 퍼붓고 보는 것이다.




결국, 석 달 뒤 미쓰 리는 패소했고 잔뜩 화가 난 채 나를 찾아와 또다시 개와 소의 자녀를 거론하며 상대방을 씹어먹듯 비난했지만, 나는 덩달아 개자녀, 소자녀를 욕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를 내주지 못했다.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계약서를 잘 못써서 온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남의 말에 속아서, 상대방이 협박해서, 아니면 뭐 잘 아는 사람이 좀 써달라고 부탁하니까 등등 이유도 각양각색이지만, 이미 체결된 계약의 효력을 뒤늦게 부정할 수 있는 증거는 전무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이런 류의 사건은 변호사 입장에서 매우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이다.


진실은 언제나 흙속에 파묻힌 채 스스로 빛나지 않는 법인데, 그걸 이 빠진 호미 하나 없이 맨 손으로 내기란 여간 곤란하지가 않다.


그러니, 계약서는 누구와도 어디서든 함부로 쓰는 게 아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돈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진리에 가깝다. 세상에 '그냥 믿고서 하는 계약' 따윈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바닥 생활을 하면서, 원래 가족과도 같은 사이였다는 사람들이 계약 때문에, 좀 더 까놓고 말하면 돈 때문에 원수만도 못한 사이가 되는 걸 숱하게 봤다. 한 때는 서로 좋아서 죽고 못살더니 이제는 싫어서 죽고 못살게 된 그들이 가진 공통적인 문제는 서로가 그냥 하는 말을 너무 쉽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짐짓 잘난 척을 해가며 미쓰 리에게 '다음부터는 계약서에 신중히 서명하시고 잘 모르겠으면 서명 전에 상담을 받으시라'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당연하게도 미쓰 리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명을 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버렸다는 소식만 전해질뿐이었다.


이전 01화 생계형변호사 프롤로그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쾌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