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of Dreams
아프리카의 어느 해변에서 눈을 떴다. 나는 비치 체어에 누워 아주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한 번도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으니, 그곳은 내 상상 속의 해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영화 속에서 본 해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쥬드 로 주연의 '리포 맨'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 같은 해변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묘하게도 영화의 그곳 역시 주인공의 꿈속 해변이었다) 어쩌면 그런 휴식 역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휴식이었던 셈이다.
한참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데, 어떤 아이가 내게 다가와 과일을 건넸다. 하나 사볼까 하고 아이가 든 바구니를 들여다봤다. 이름 모를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바구니에 가득했다. 과일을 하나 집어 들고 아이와 얘기를 나눴다. 아이는 햇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로 삐뚤빼뚤하지만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더듬거리는 영어로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언젠가 자기는 꼭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 거라고 말했다. 한국에 오면 꼭 내게 연락하라고 말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아이가 정말 한국에 올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왜 그곳을 아프리카라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프리카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그다지 그곳을 동경하는 편도 아닌데 왜, 꿈속의 그 해변을 아프리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저 낯선 곳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곳 중에서 가장 낯선 곳이 바로 아프리카였던 것이다. 이가 하얀 그 아이가 전 세계를 유람하고 싶었던 것도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준 것인지도. 나도 너에게 한 마디 해주자면, "낯선 곳을 원한다면 사실 한국만 한 곳이 없지."
난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과일을 들고 해변 안쪽으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해변을 벗어나자마자 그곳에는 바로 거대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홀연히 사라진 그곳처럼 말이다. 숲에 들어서니 이런 공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기가 청량했다. 잔뜩 들이마실 요량으로 연신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치 라임 맛 탄산수 같은 맛이 나는, 혼자 누리기에는 아까운 공기였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은.
숲을 따라 걷다 보니 신기하게도 아파트들이 나왔다. 전혀 아프리카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내가 살았던 둔촌주공아파트처럼 낡은 아파트였다. 복도식 아파트의 외벽과 문들에 알록달록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들어 연신 셔터를 눌렀다. 뷰 파인더에 담긴 세상이 눈으로 보는 것만은 못했지만, 어떻게 찍어도 다 멋진 사진이 나왔다. 사람 사는 곳의 풍경이 이렇게 생동감 있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걷다 보니 다시 더워졌다. 마침 눈앞에 나타난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 냉장고 속에는 막대에 달린 각종 과일 맛 아이스크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 중 뭘 먹을까 한참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동그란 눈과 광대가 예쁜 여자 점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고민만 하고 살면 참 행복하겠다 싶은 찰나에, 웃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망고 맛이었는데. 그렇게 막 정하려던 참인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 어디에나 색의 향연이 펼쳐진 꿈이었다. 세상의 모든 색을 다 보고 온 것 같은 기분. 망고 맛 아이스크림까진 아니더라도, 그 사진들만이라도 가지고 나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꿈 때문에 한동안 사는 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나 익숙한 빛깔, 약속된 색깔들만 있으니까. 가끔 보면 세상은 어릴 때 미술 시간에 그리던 포스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위아래로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같이 그럴싸한 표어를 적고, 그림을 그리되 꼭 몇 가지 색 이상은 쓰지 말라고 했었다. 색은 종종 그 사물 고유의 것이 아니라, 그걸 보는 이들을 위한 약속으로 기능한다.
만약에 과일 장사로 떼돈을 번다고 해도 절대 한국까지 올 리 없을 것 같았던 그 아이가 짠 하고 나타나줬으면, 그 과일바구니를 들고 와 하나하나 이름을 알려줬으면, 아침 지하철에서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