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of Dreams
영화 속 공간은 종종 현실 속의 서로 다른 공간을 이어붙여 창조된다. 서울에서 좁은 길로 들어섰는데, 부산의 골목으로 튀어나오는 식이다. 꿈도 마찬가지. 기억 속에 담아두었던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새로운 시공간이 된다. 꿈을 꾼다는 것은 기억 속에 쌓인 오래된 필름들을 꺼내어 이리저리 이어붙인 뒤 영사기에 걸어두는 것과 같다. 두서없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들.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꿈의 편집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본의 아니게 자주 재활용하는 장면은 바로 고등학생 시절이다. 평소에 고등학생이 된 꿈을 자주 꾼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니고, 꼭 고등학생이다. 전형적인 남고를 다녔지만, 꿈속의 학교는 늘 그보다 창의적이다. 남녀공학이 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급우로 나오기도 하고, 유명인이 느닷없이 짝꿍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예 배경만 학교일 뿐 내 신분은 학생이 아닌데 지금 모습 그대로 교실에 앉아있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이 꿈들은 실제 나의 고등학생 시절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영역에는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 않아 아예 대조가 불가능하지만.
애써 돌이켜봐도, 딱히 떠오르는 사건이나, 선명한 장면 같은 게 별로 없다. 그저 단조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떤 날을 뚝 떼어다가 한두 달 전후의 날들과 뒤섞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법한 일상 속에서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갔다. 친구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친구도 '급우' 정도였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주변 얼굴들이 함께 바뀌었다. 많은 즐거움을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살면 큰 형벌이 내려질 것처럼 여겨졌던 일들이 실은 그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인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없었던 각종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난 학생으로 돌아간 꿈을 즐기는 편이다. 아예 시간 여행을 통해 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꿈도 꾼 적도 있었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아직도 그 느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인생을 허비하던 내가 이름 모를 중년의 사내를 만나(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인생의 의미를 찾아오라는 숙제를 받는다. 이미 어른이 된 머리로 다시 학생이 되니, 그때는 보지 못 했던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침 여름방학이었는데, 나는 전국을 여행하며 미래에 같이 밴드를 하게 될 친구들을 찾아 미리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우리 밴드 멤버는 다 동네 친구들인데, 전국에 흩어져 사는 것으로 각색되어 있었다) 마치 퀘스트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처럼 멤버들을 모아 여행길 위에서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자기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는데(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 그녀를 미래에서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인생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애를 쓴다. 여자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던 것인지, 그냥 만들어둔 노래가 적당히 쌓여서였던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졸업식 대신 학교 옥상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꿈이 끝난다. (영화 '밴디트'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게 진짜 나의 학창시절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뛰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마침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꿈에서 깨고 보니 인생에 '의미'라는 게 분명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리고 다시 살면 어떻게 살겠다는 꿈이 생길 만큼,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다시 살면 제대로 음악을 해보겠다, 이런 건 물론 아니지만.
학생이 되는 꿈에는 두 가지의 욕망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과거의 욕망'과 '현재의 욕망'이다. 그때 제대로 누리지 못 했던 것들이 '과거의 욕망'이라면,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했지만 만약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꿈은 '현재의 욕망'일 것이다. 꿈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럴까? 잠들어 꾸는 '꿈'과 이루고 싶은 '꿈'이 동음의 단어인 것은(심지어 외국어로도) 참 절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