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seo May 05. 2018

아노말리사 -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의 지옥

Anomalisa, 2015



암전 상태에서 누군가의 대화가 들린다. 목소리 위에 목소리가, 말 위에 말이 쌓여 무슨 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건 대화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말, 다 같은 것이나 다름없는 목소리가 아닌가. 영화 '아노말리사'는 이런 발상에서 출발한다. 

    


목적이 있는 말 위로, 필요도 의미도 없는 말들이 마구 침범한다. 감독은 주인공 마이클의 대화 위에 의도적인 소음을 덧씌운다. 기내와 공항의 안내 멘트부터 택시 안 라디오 소리, 무전기의 음성, 호텔방 TV에서 나오는 화재 시 대피 안내까지, 소음은 쉴 새 없이 주인공을 방해한다. 아내의 원망 섞인 말들도 어쩌면 그에게 소음이었을지 모른다.


소음만 문제인 게 아니다. 영화 속 세계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곳처럼 보인다. 뜬금없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옆자리 승객, 자기 할 말하는 택시기사,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되묻는 벨보이까지, 마이클은 호텔방에 오기까지 누구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물론 애초에 그 역시 대화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굳이 영화 속이 아니어도, 현실 속 우리 역시 하루에 단 한 마디의 소통도 해내지 못하곤 한다. '아노말리사' 속의 비현실적인 세계는 오히려 너무 현실 같아 섬뜩하다.



주인공 마이클이 고객과의 진정한 소통을 강조하는 고객 서비스 전문가라는 사실은, 마치 잔인한 농담 같다. 강연을 위해 신시내티를 찾은 '소통 전문가' 마이클은,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소음 때문도, 너무 많은 말들 때문도 아니다. 그건 (소통 전문가조차도)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허우적대던 마이클은 옛 연인이었던 벨라에게 연락을 해본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게 되지만 그의 말은 서툴기만 하다. 애초에 벨라를 향한 욕망이 과거나 지금이나 인스턴트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벨라를 만나는 동안 그녀의 무엇도 바꾸지 못했으며, 그들은 서로에게 의미 없는 소음이자 잡음이었을 뿐이다.

 


영화가 계속되면서 관객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목소리가 한 사람의 것이란 사실이다. 심지어 여성 캐릭터도 톤과 억양만 다를 뿐 한 명의 남자  목소리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마이클은 그게 누구든 타인의 말이 모두 똑같이 들리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타인이란 개성이 지워진 존재다. 각각의 개별적인 타인이 아니라, 청중이자 군중으로, 하나의 덩어리와 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이클의 고독에서 비롯된 세계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이러하다는 은유일 수도 있다. 내가 아닌 모두를 타인이라는 덩어리로 대하는 한, 그들과의 소통이 가능할리 없다.


어쩌면 영화가 보여주는 그대로, 세상은 생명체가 아닌 인형들로 가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쁘거나 귀엽기는커녕, 이마와 광대와 턱을 얼기설기 끼워 맞춘 얼굴을 한 인형들 말이다. 마치 차량 안전 테스트에 사용되는 더미같이 생긴 그들은, 인간이 불완전하게 조립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는 망가지게 될 운명이라고 역설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현대의 인간이 로봇과도 같다고 은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이런 생각을 부추긴다. 거울을 보던 마이클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하며 표정이 뒤섞이는 장면에 이르면, 불편한 감정이 절정에 달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진심 같은 건 없으며, 필요에 따라 잘 바꿔 끼우면 그뿐인 가면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계가 고장 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로봇은 언젠가 다 오류가 생기게 마련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리사는 마치 마이클, 그리고 우리 모두를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등장한다. 리사만 다른 목소리(제니퍼 제이슨 리)이기 때문이다. 마이클과 리사가 원나잇스탠드를 가질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말 그런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세상은 갈수록 더 그로테스크한 지옥이 된다. 난데없이 호텔 직원이 사랑 고백을 하는가 하면, '우리는 모두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며 달려든다. 모든 타인의 목소리가 같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마이클에게 있어 세상은 모두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비행기, 공항, 택시, 호텔 모두 그를 위해 존재하는 서비스일 뿐, 그 안에서 만났던 모든 타인은 그에게 존재로서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리사는 마이클에게 더더욱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세상에 자신과 리사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같은 목소리의 로봇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리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아노말리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바로 마이클의 고백 직후였다. 그때부터 그에게 리사의 온갖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포크에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입에 음식을 넣고 말하는 게 거슬리는가 하면, 그녀의 말이 왠지 지시조로 들린다. 그리고 리사의 목소리마저 다른 모두의 목소리와 점점 비슷해진다. 새로운 관계라고 생각했던 만남은 금세 익숙하고 낡은 것이 되고 만다. 아마 마이클은 수도 없이 이런 경우를 겪어왔을 것이다. 자신이 건드리면 돌로 변해버리고 마는 관계 말이다. 욕망할 때까지는 분명 의미 있는 누군가였는데, 내 것으로 편입되는 순간 의미 없는 타인이 되고 만다. 벨라, 아내와 아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리사도 결국 모두와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를 가진 존재가 된다. 'Abnormal'한 존재였던 리사 역시 남들과 같은 'Normal'한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집에 돌아간 후에도 마이클은 같은 얼굴과 목소리를 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마 그는 영원히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만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친구 에밀리와 함께 돌아가는 차 안에서, 리사의 얼굴과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다. 에밀리 역시 자기의 얼굴을 하고, 자기의 목소리로 말한다. 이 모든 건 마이클의 시선으로 본 세계였던 것이다.



위선적인 주인공의 최후는 역시나 음울하다. 위선은 그대로 내게 돌아온다. 세상은 온전히 내가 보고 듣는 대로 만들어진다. 타인을 차이가 거세된 타자, 한 덩어리의 객체로 치부하는 한, 우리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인형들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하자면,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가 자기 머릿속으로 들어가 마주한, 모두가 자기 얼굴을 한 세상을 하나의 영화로 풀어낸 셈이다. 내가 진심으로 남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모두 독백에 불과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트크롤러 -언젠가 만나게 될 밤의 괴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