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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Aug 24. 2018

데몰리션 - 다 때려 부수고 난 뒤에 남은 것

Demolition, 2015

*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영화를 보시고 읽으시는 게 더 좋습니다.


물건들은 늘 '갑자기' 고장 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멈추고 꺼지고 망가져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멀쩡하던 것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망가진다. 아니, 그렇다고 간주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건들은 대체로 '서서히' 고장 난다. 낡고 오래된 물건들은 조금씩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좀 성가신 상태가 된다. 고치면 될 것 같은데, 막상 고치기는 귀찮다. 내버려 두면 좀 삐걱거리거나 깜박거릴 뿐이다. 곧 망가져 버릴 거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데몰리션'의 주인공 데이비스는 이 신호를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간관계는 망가져 버렸고, 삶은 '갑자기' 고장 나 버렸다. 분명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지난 모든 일이 징후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데이비스는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 기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일상이 허울만 멀쩡한 건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분해해 원인을 밝혀내든, 해체하고 철거해 완전히 망가뜨리든, 끝장을 봐야 할 대상으로 말이다.    



사고 직전 아내와 나눴던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물이 새는 냉장고를 왜 아직까지 고치지 않냐는 타박. 아내가 죽고 난 후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아내가 사투를 벌였을 병상, 함께 살았던 집, 모두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사실 우리의 삶에 무심하다. 소리조차 없는 진공 상태와 같은 공간에서 아내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문제는 데이비스 역시 이 상황이 무심하게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이다.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슬픔에 사로잡혀야 할 상황에, 그는 거짓말처럼 태연하기만 하다.


원래 사람의 감정이란 자판기처럼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뭔가 튀어나와야 정상이 아니던가.  


아내가 죽은 후 병실 앞 복도에서 고장 난 자판기를 마주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순탄하고 무탈했던 인생이 한순간에 고장 난 것에 대한 분노였을까. 망가진 기계가 꼭 자신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판기 관리 업체에 보낸 편지는, 항의라기보다는 자기 고백, 혹은 고해성사에 가깝다. 그렇게 한다고 환불을 받는다거나, 자판기가 고쳐진다거나, 혹은 자신의 삶이 기적처럼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눈앞의 문제에 대해 그가 아는 해결책이 정해진 절차를 밟는 것뿐이었고, 무엇이라도 얘기할 수 있는 창구가 그곳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데이비스가 보이는 일련의 이상 행동들은 슬픔과 분노를 감추고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감정 회로가 어긋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변 모든 게 비극적인 삶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돌발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사로잡힌다. 자기 파괴적인 상상이 도를 넘어, 달리는 열차를 갑자기 세우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더 필사적으로 편지 쓰기에 매달린다. 의심과 불안은 분명 더 커진다. '나는 역시 고장 나 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면 곧 고장 날 거라고 신호가 오고 있는데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이 새는 냉장고, 컴퓨터의 오류 메시지, 불이 깜박거리는 조명등, 여닫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화장실 문처럼 말이다.


If you wanna fix something, you have to take everything apart, and figure out what's important.


그의 장인은 고장 난 게 있다면 고쳐야 한다고 충고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해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사무실 컴퓨터, 화장실 문, 커피 머신 등을 모조리 분해하기 시작한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도무지 나도 내 속을 모르겠고, 할 수만 있다면 뜯어서 어디가 문제인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말이다. 데이비스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끼워 맞추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물건도 다시 조립하지 못한다.



그런 그를 쫓아다니는 여자, 캐런이 있다. 호기심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도 나름의 결핍이 있다. 데이비스가 그녀를 만나는 건, 기계를 분해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다만, 자신이 어디서부터 고장 난 것인지, 왜 샤워하다 울컥하게 되는지, 그럼에도 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지, 혹시 심장 한쪽이 매미나방에 뜯겨 없어진 것은 아닌지, 아버지의 말대로 제때 비료를 주고 약을 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는 것이다.


아니면, 그는 그냥 다 때려 부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캐런보다 캐런의 아들 크리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 캐런이 어떻게든 고쳐서 적응하고 살아 보려는 인물이라면, 크리스는 세상에 반항하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데이비스도 마치 질풍노도 시기의 아이들이 그렇듯 성장통을 앓고 있는 셈이다. 아내를 잃은(혹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남편이나,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소년이나, 스스로 어느 한구석이 고장 난 게 아닌지 고민할 테니 말이다. 대상이 자신이든 세상이든 뭔가 하나는 다 때려 부숴야 해결될 일이라고 느낄 테니 말이다.



데이비스는 크리스와 함께 일탈을 일삼는다. 방탄조끼를 입고 총을 맞아 본다거나, 크리스가 녹음해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거리를 활보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자기 집을 직접 때려 부수기에 이른다. 집안의 가구, 가전제품을 비롯해 벽과 창문을 산산조각 내고, 불도저까지 동원해 모조리 박살 낸다. 마지막으로 그와 아내, 둘만의 공간이었던 침실을 부수다 아내가 임신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는 사고 직전 고장 난 냉장고를 나 몰라라 하는 데이비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 것 아니다 이거지?" 아내의 삶과 일상은 확실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었던 걸까?


아내의 이름을 건 장학기금 연회에서 외도와 임신 사실이 알려지고, 크리스가 밤거리에서 집단 린치를 당하는 장면에 이르면서, 영화 속 갈등은 극에 달한다. 장인이 말한 것처럼 세상 모두가 아내 대신 차라리 데이비스가 죽었길 바라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 내내 그를 쫓아다녔던 스테이션웨건의 정체가 밝혀진다. 아내의 묘지에서 만난 그는, 불륜남이 아니라 교통사고 가해자였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데이비스는 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를 시종일관 따라다녔던 감정이 바로 죄책감이었음을 깨닫는다. '바쁜 척만 하지 말고 나 좀 고쳐줘요'라는 아내의 메모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해소할 수 없는 죄책감에 아무것도 똑바로 볼 수가 없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삶은 사건사고의 연속이다. 불운은 조용히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집어삼킨다. 인생이 좀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설령 어떤 징후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 부수고 망가뜨린 끝에야 데이비스는 비로소 깨닫는다. 어쩌면 다 분해하고 해체하는 그 과정이 있었기에 깨달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제서야 데이비스도, 그리고 관객들도 뜬금없지만 상징적인 엔딩, 사소하지만 감동적인 엔딩에 이른다. 버려진 회전목마를 아이들이 탈 수 있게 복원한 것이다. 이는 데이비스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과 정반대의 행위이다. 영화 내내 그가 한 일은 아직 쓸 수 있지만 어딘가 조금 삐걱거리는 물건들을 부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회전목마는 누구도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걸 다시 고쳐낸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 더 아름답다. (숫자 놀음을 하던 이들이 기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 만든 장학기금과 달리 말이다) 무언가를 부수는 것이 뒤를 돌아보는 일이라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데이비스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도 기계처럼 고칠 수 있는 존재일까. 다 뜯어낸 후에도 다시 끼워 맞춰질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완벽하게 다 부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무언가를 다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결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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