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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06. 2018

안시성(2018) - 전투 장면들로 쌓은 모래성


전투 장면들만 보면 한국 영화의 기술적 진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액션 연출, 편집 등이 맞물려 완성도 높은 전투 시퀀스들을 선보인다. 스케일을 키우고 촬영기법과 CG에 공을 들여 기존의 사극 액션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볼거리를 선사한다. 로마 시대나 중세 시대 전투를 다룬 영화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퀄리티를 얻어냈다.


하지만 지나친 기술 자랑과 야심은 독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익히 알려진 영화들을 참고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대로 따라 만들다 보니 딱히 새로울 게 없는 영화가 됐다. 특히 가장 공을 들였을(모든 내러티브를 포기해가며 사실상 주인공으로 내세운) 공성전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을 그대로 베껴왔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베껴오다 보니 역사적 고증은 아예 맞춰볼 수조차 없는 수준이 됐다.



내러티브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사실상 사물(남주혁 扮)이 서사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데, 외지인의 시선으로 양만춘(조인성 扮)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조인성의 아쉬운 초반 연기와 맞물려 아쉬운 선택이 되고 말았다. 관객 역시 사물과 같은 관찰자 입장에 서게 되어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대상화하니 배우의 연기력이 더 도드라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사물이라는 인물의 고뇌가 적절히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양만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성민을 수탈하는 등 악행을 일삼는다거나, 역심을 품고 평양성과 척을 지고 있다거나)을 초반부에 배치해 그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물에게 전사(前事)를 부여하고 양만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등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영화는 사물을 비롯해 어떤 캐릭터에 대해서도 공들여 구축하지 않는다. 제일 중요한, '안시성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사실상 이 영화 그 자체인, 양만춘 역시 좋은 면만 마구 붙여 신화 속 영웅을 만들어놨지만, 그가 어떤 성주인지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는 소탈하고 자상한 데다가 카리스마와 포용력까지 두루 갖춘 성주이고,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서왕처럼 주몽의 활시위를 당긴 영웅이기도 하다. 좋은 건 다 갖다 붙였다는 얘기다.



결국 영화의 주인공은 양만춘도 안시성도 아닌 네 번의 거대 전투들이다. 이를 순서대로 펼쳐 놓기 위해 '안시성'은 지나치게 친절한 길을 택한다. 적당한 시점에 조연을 희생시켜 감정을 고조시키고, 조금이라도 복잡할 것 같은 플롯은 가차 없이 잘라낸다. 배신한 신녀는 자기 입으로 쉽게 죄를 고백하고, 백하(김설현 扮)는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없이 연인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적진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든다. 큰 고민 없이 액션만 즐기라는 의도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속의 감정들이 모두 가짜가 되고 만다.


결국 '안시성'의 서사는 그저 대규모 전투로 가기 전까지 억지로 채워 넣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 공든 탑은 의미 없이 무너질 모래성이었을 뿐이다. 이 껍데기뿐인 성을 쌓기 위해 영화는 너무 많은 걸 희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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