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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12. 2018

홀로그램 포 더 킹 -  21세기 판 세일즈맨의 죽음

A Hologram for the King, 2016


데이브 에거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위기의 중년을 위트 있게 다룬 코미디. 주인공 앨런 클레이(톰 행크스 扮)이 처한 상황은 오프닝 시퀀스의 꿈으로 요약된다. 집, 차, 가족 등 지금껏 꾸려놓은 모든 것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앨런은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뉴웨이브 밴드 Talking Heads의 곡 'Once in a Lifetime'을 사용했는데, 'Same as it ever was'를 반복하는 후렴구가 인상적이다)

코미디라면 필시 웃음을 주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홀로그램 포 더 킹'은 적절한 타이밍을 찾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별로 웃기지 않다. 소설 원작이라는 점을 감안해 이야기에 숨어있는 지극히 문학적인 위트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에게 홀로그램 화상회의 시스템을 세일즈 하러 간 남자. 그는 이곳 사막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씩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인생의 모든 면에서 참패한 주인공은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 그에게 두 번째 기회라는 게 과연 있을 것인가. 그는 낯선 땅에서 본 적도 없는 왕에게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첨단기술을 파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는 주인공 앨런을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뜨린다. 이 모래 더미 어디에도 이정표 같은 건 없다. 아직 삶은 끝나지 않았는데 갈 곳이 없다. 잘 나가는 기업의 중역이었지만 직원들을 대량 해고해야 했고 지금은 빈털터리 세일즈맨이 됐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 딸의 학비조차 못 대주는 신세다. 등에 난 혹은 마치 이 모든 짐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육체까지 늙고 망가진 이 남자에게 남은 것이라곤 신발 속 모래와 흙먼지뿐이다.


비슷한 주제를 유사한 방식으로 풀어낸 영화들이 몇 있다. 이완 맥그리거, 에밀리 블런트 주연의 '사막에서 연어낚시'는 말 그대로 사막에서 연어 낚시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엉뚱한 프로젝트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조합했다. 앨런 역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을 하는 중년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의 빌 머레이처럼 낯선 땅, 낯선 말들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의 당혹감은 '아노말리사'에서 주인공 마이클이 느끼는 감정과도 닮았다.  


'홀로그램 포 더 킹'은 수백 번도 넘게 반복되었을 은유들을 변주한다. 나이 먹은 아저씨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이런 신세라는 것처럼 말이다. 앨런이 앉는 의자마다 다리가 부러지는 장면에서 보듯, 이 아저씨들에겐 갈 곳도 편히 앉을 곳도 없다. 앨런이 스스로 말하듯 몇몇 능력도 사라졌는지 모른다. '다른 길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는 질문에도 명쾌히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릴 뿐이다.



앨런은 제조업의 쇠퇴와 오랜 경제 침체로 쓰러진 미국 중산층 아버지들, 몰락한 글로벌 경제 속에서 허우적대는 가장들을 대변한다. 잘 나가는 자전거 제조업체의 중역이었던 그는 세계화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던 제조업은 중국, 인도 등 제3세계로 다 빼앗긴 후였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고스란히 내어준 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그램 포 더 킹'은 21세기 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부적응, 무너진 중산층 가정, 허상과도 같은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냉소는 '세일즈맨의 죽음'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풀어내는 방식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일 뿐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차용한 부분도 엿보인다. 앨런이 애타게 기다리는 왕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와 같은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앨런은 마치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왕을 무작정 기다리지만, 그를 본 적도 없고, 그가 자기 솔루션을 원할 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세일즈는 해볼 틈도 없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실없는 대화들만 이어진다. 양치기 소년이 나타나 고도 씨가 내일 올 거라고 알려주듯 중간관리자가 나타나 왕이 곧 올 거라고 말해주는 상황이 반복된다.



어쩌면 '홀로그램 포 더 킹'은 정말 영화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랍의 낯선 풍경과 문화는 이질적인 공간으로 활용될 뿐이고, 톰 행크스는 실제가 아닌 홀로그램 무대 위에서 모노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무대 설치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동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전형적인 미국인을 대변하는 톰 행크스의 시선이 '혐오'로 해석되진 않지만,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의 혐의까지 벗기는 어려워 보인다. 

편리한 방향으로 흐르는 결론에 이르면 혐의가 보다 짙어진다. 주인공은 갑자기 중년의 '유브 갓 메일'을 찍으며 의사 자라(사리타 초우드리 扮)와 사랑에 빠진다. 계약은 따내지 못하지만 새로운 사랑을 얻으며 인생 2막을 여는 승리자가 된다. 방황 끝에 얻은 결론은 그럴듯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외롭게 표류하던 주인공은 손쉽게 정박할 곳에 도달하고, 신비로운 중동의 여성이(영화가 제시하는 스테레오타입으로 해석하자면 개방적인 신여성) 그를 맞이한다. 21세기 판 윌리 로먼은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난 셈이지만, 그 과정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편견 속 제3세계에서 다시 찾은 사랑이 미국의 몰락한 아버지에게 희망이 된다는 결론은 좀 우스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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