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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25. 2018

주피터스 문 - 현실과 비현실의 극단적인 충돌


‘주피터스 문’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담아낸다. 전 세계적으로 첨예한 이슈인 난민 문제를 중심으로 헝가리 사회 전반을 조망한다. 말 그대로 공중에 뜬 상태로 내려다본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인물들의 뒤를 숨 가쁘게 쫓는다. 사회의 폐부를 다 헤집고 들어가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성공적으로 사회 현실을 담아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영화의 야심이 넘쳐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듯한 표현부터 종교적 구원의 테마까지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주피터스 문'이 절대 조우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과 비현실의 극단을 충돌시킴으로써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유의 단초로 이어질지는 관객 개개인의 감상에 따라 갈릴 것 같다. 



'주피터스 문'은 현실과 비현실을 담아내는 데 있어 촬영 기법에 많은 공을 들였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극단적인 롱테이크가 현실 세계를 반영한다면, 공중부양 신에서 유려하게 회전하는 카메라 워크는 비현실을 대표한다. 


영화의 오프닝 신은 숨조차 쉴 수 없는 압도적인 롱테이크로 시작된다. 카메라는 닭장 속의 닭처럼 실려가던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물속과 숲을 가로지르며 도망치는 아수라장을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이를 통해 관객들을 숨 가쁜 추격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관객은 달아나는 자의 입장이 될 수도, 쫓는 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 


주인공 아리안이 총에 맞은 후 화면은 곧바로 공중부양 장면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공중에 뜨는 게 아니라 상하좌우로 마구 회전하는 인물을 공전하는 카메라가 역동적으로 담아낸다. '주피터스 문'은 첫 장면부터 현실과 비현실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이어붙여 관객의 동요를 이끌어낸다.



이후에도 롱테이크는 꾸준히 활용된다. 인물들은 프레임 안팎을 넘나들고, 핸드헬드 카메라는 꾸준히 그들의 뒤를 쫓는다. 보통 피사체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난민 아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들어 총 쏘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주피터스 문'의 카메라는 사건을 가만히 따라가는 전지적 시선이 아니라, 영화 안에 실재하는 관찰자의 시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 속 현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공중부양 장면 역시 여러 상황에서 반복된다. 부패한 의사 스턴의 돈벌이에 이용될 때마다 아리안은 곳곳에서 부양한다. 영화는 그때마다 수직으로 자전하는 인물을 수평으로 공전하는 카메라로 담아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는 비행이라기보다는 우주의 천체가 도는 방식에 가깝다. 아리안은 자신의 몸만 공중에 띄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변 사물에 미치는 중력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주피터스 문’이 관객의 뇌리에 남기는 단 하나의 이미지는, 역시 이 공중부양 장면일 것이다. 관객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주인공이 일종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영화를 히어로물로 해석한 평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아리안의 공중부양은 현실과 대척점에 있는 비현실에 대한 상징으로서만 기능한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 역시 해결하지 못한다. 땅에 발 디디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신분조차 증명할 수 없는 난민 소년에 불과하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현실에 현현한 천사에 가까우며, 그 자체로 현실에 없는 희망이나 종교적 구원을 은유하고 있을 뿐이다. 


아리안의 역할은 스턴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에 의해 공고화된다. 뒷돈을 받고 붙잡힌 난민들을 빼주는 스턴은 혼탁한 현실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그는 음주로 인한 의료 사고로 사람을 죽게 해 면허가 정지된 상태다. 당연히 신도 믿지 않는다. 성경에 학살, 고문, 간통 얘기가 가득하다고 힐난하는가 하면, 신 말고 나에게 감사하라며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그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발견한 죽은 새처럼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존재다. 그런 그에게 현실을 뛰어넘어 하늘을 나는 아리안이 나타난 것이다. 


스턴은 난민들의 절실한 희망을 이용해왔던 것처럼, 남의 믿음을 이용하려 한다. 아리안을 병자나 약자들에게 데려가 천사가 나타난 것처럼 속이고 돈을 받아낸다. 그는 그 돈을 의료사고 피해자 가족에게 주고 새 출발을 하려 한다. 속죄와 구원을 모두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대신 아리안이 구원의 메시지를 가져온 천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스턴이 신발 끈을 묶어주는 동안 아리안은 그의 머리를 짚는다. 마치 그의 죄를 사하노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턴은 아래와 같은 말로 자신이 믿음을 되찾았음을 분명히 한다. 


"넌 우리에게 메시지를 가져온 거지? 사람들은 위를 올려다보는 걸 잊고 살았어. 수평적으로만 살지. 우리 관계 속에서 말이야. 예전엔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서 희생하던 시절도 있었어. 그 세대가 지나니 다들 잊고 살지."


스턴이 변화하는 과정에는 개연성이 없다기보다 아예 제대로 된 서사가 없다. 이 영화에 탄탄한 내러티브를 기대했을 관객이야 별로 없었겠지만, 영화는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표현주의 영화 같은 자세를 취한다. 난민 문제, 혹은 기타 사회 현실을 종교적인 테마로 풀려고 했다면, 현실을 대변하던 인물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종교적 구원까지 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했다. 영화는 형식과 상징에 취해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놓치고 만다. 



영화는 정치적 이야기와 종교적 이야기가 각각 가로 축과 세로 축으로 공전 및 자전하며 서로 엮이길 바란 것 같다. 도식화까지는 성공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로축의 현실, 세로축의 비현실은 다소 뻔한 도식이지만, 패닝이나 틸트 업/다운 같은 방식이 아니라 보다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활용해 주제와 형식을 독창적으로 연결한다. 하지만 도식화까지만 성공했을 뿐이다. 영화가 내세우는 믿음과 구원은 공허하다. 난민 문제로 가면 더 그렇다. 영화의 이야기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날아가 버리기 직전이다. 


결과적으로, ‘주피터스 문’의 이미지는 난잡하고 어지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형식 과잉이다. 숏을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로 다 연결해 촬영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제대로 연결하지 못했다. 수많은 테마를 일단 공중으로 띄워놓긴 했지만, 무엇 하나 땅에 다시 발 디디게 하지 못한다. 이미지만 남아 공중을 떠도니 형식의 의도마저 파괴되고 만다. 


주피터스 문(Jupiter’s Moon), 즉 목성의 위성은 79개나 되는데(영화 초반 자막에는 67개로 나오지만, 이는 2012년 기준이다. 최근 12개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중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위성의 이름이 ‘유로파'다. 영는 ‘유럽’과 같은 어원(에우로페)을 가진 이 별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 생명(Life)을 찾듯, 유럽에서 인간의 삶(Life)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은 자전, 공전하는 수많은 위성 중 어느 게 유로파인지 제대로 찾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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