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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Apr 15. 2020

보헤미안 랩소디 -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

'보헤미안 랩소디'는 엄청나게 감정적인 영화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비롯해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그건 영화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감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퀸의 노래들이 만든 감동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저 그랬고,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었다. 




서사의 부재, 허술한 밴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밴드를 한 번도 안해본 사람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밴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곡이 만들어지는지, 밴드는 왜 필연적으로 다투고, 왜 매우 높은 확률로 해체 위기를 맞는지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밴드가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고 내려오는지 멤버들의 심리 또한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영화는 그저 외부자의 시선으로 퀸의 흥망성쇠를 바라본다. 퀸의 디스코그래피를 겉핥기식으로 훑으니, 정작 퀸이라는 밴드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퀸에 대해 잘 몰랐던 관객들이라면, 이 요약본을 통해 그들의 역사를 일람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어디까지나 프레디 머큐리 전기영화이지만, 퀸의 전기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에 밴드의 내부 이야기가 제대로 담기지 않은 점은 좀 아쉽다. 영화로서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저평가 받을 수밖에 없는 것도 이때문이다. 프레디 머큐리의 행적, 밴드의 족적을 충실하기 좇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내러티브를 담지 못한 것이다. 밴드의 역사를 시계열적으로 나열만 하다 보니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할 인물과 이야기는 빠지고 말았다.



배우들이 모두 실제 퀸 멤버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화제가 됐는데, 그게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놀라운 싱크로율로 인해 '보헤미안 랩소디'는 외려 퀸의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재연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한다. 아무런 서브플롯도 부여받지 못한 밴드 멤버 캐릭터들은 그럴듯한 이미지만 남긴다. 영화의 주인공인 프레디 머큐리는 다채롭게 조명되는 편이지만, 그 역시 자기 이야기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프레디와 멤버들이 스스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퀸이 어떤 밴드인지 언급하는 부분은 다소 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자의식 과잉이야 모든 엔터테이너의 공통 분모겠지만, 영화로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퀸이 직접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만약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의 회고 인터뷰를 넣었다고 생각해 보자. 프레디의 가족을 비롯, 퀸의 제작자와 매니저, 라이브 에이드에 함께 선 밴드들의 인터뷰도 삽입했다고 상상해보자. 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헤미안 랩소디' 개봉 당시 각종 미디어에서 영화 자체뿐 아니라 밴드의 뒷이야기를 많이 다뤘던 것은, 영화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다큐멘터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만 보고 가는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앞만 보고 가는 영화다. 이는 프레디 머큐리가 본인의 선언대로 앞만 보고 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행보다. 영화는 아침에 일어나 웸블리 공연장 무대에 오르기까지 프레디의 뒤를 좇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 통해 영화 역시 같은 곳을 향한다. 마지막 웸블리 공연 장면에서 모든 감정을 폭발시키는 게, '보헤미안 랩소디'가 의도하고 있는 최종 목표 지점이다.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 역시 엔터테이너로서의 삶, 그것 하나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 그가 뒤에 남겨두고 벗어나고자 했던 것들이 있을 텐데, 영화는 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가족이라는 굴레, 남들과는 다른 성 정체성, 그로 인해 떠나 보내야 했던 평생의 사랑, 무대 위 엔터테이너로서의 열정과 욕망 등 다양한 소재들을 늘어놓지만 다층적인 테마들을 한데 엮진 못한다. 그나마 이런 묘사들이 궤도에 오르는 건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부터인데, 그의 고뇌와 고독을 표현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효과적으로 전달되진 않는다. 



즉, '보헤미안 랩소디'는 뮤지션이 아닌 프레디, 뮤지션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프레디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마치 그를 날때부터 다른 존재였던 것처럼 취급한다. 이는 전기 영화의 나쁜 예에 해당하는데, 주인공에 대한 시각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를 철저히 별종으로 다룬다. 이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프레디는 세상이 자신을 변태, 별종으로 본다며 분통을 터트리는데, 외려 그를 제일 별종으로 다룬 게 바로 이 영화인지도 모른다. 


프레디는 그냥 천재, 그저 특이한 별종이라 별 무리없이 곡을 쓰고, 별 굴곡 없이 인기 밴드의 프론트맨이 된다. 위기 상황이라고 해 봐야 처음 무대 올랐을 때, 립싱크를 시킬 때, 보헤미안 랩소디가 퇴짜맞았을 때 정도가 전부다. 그마저도 다 별 과정 없이 해소된다. 노래가 좋으니까 다 해결된다는 식이다. 영화가 정말 퀸에게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셈인데, 이를 통해 퀸의 노래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채워져 있어야 할 감정선들도 군데군데 비어 있는데, 이 빈 곳을 채우는 것 역시 퀸의 음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감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준비한 것 이상의 감동을 받았다면, 그건 퀸의 노래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상기된 덕분일 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제목이나 가사에 맞춰 적재적소에 활용된 노래들로 감정을 점점 고양시킨다. 그리고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 장면 하나로 영화의 모든 흠을 덮는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마치 매니저 마이애미가 몰래 콘솔에서 마스터 볼륨을 올리듯, 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슬며시 텐션을 올린다. 마치 이 공연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길고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처럼. 그 무대에 올리기 위해 퀸을 불러와 지난 이야기들을 풀어놓게 했다는 것처럼.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이 영화를 봐야하지? 공연 실황을 찾아보거나, 라이브 음원을 찾아 듣거나, 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게 낫지 않나? 의문에 대한 답 역시 웸블리에 있다. 영화는 모든 관객을 웸블리 현장으로 데려간다. 그 수많은 군중들 중 한 명이 되게끔 한다. 이 영화는 사실상 전기 영화도, 밴드 영화도 아닌, 체험형 영화에 가깝다. 그 어떤 기술을 가져와도 안될 일을 해낸다. 영화는 이를 위해 촬영, 앵글, 편집, 사운드 등을 매우 세심하게 신경썼다. 시선이 옮겨가고 카메라가 움직일 때마다 사운드를 조절하고, 프레디를 중심으로 연주 장면, 리액션 등을 잘 직조해냈다. 




10만 명이 한데 모여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것. 15억 명이 한 공연을 시청한다는 것. 이런 거대한 이벤트는 아마 다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퀸 같은 밴드도 다시 없을 것이고, '위 아 더 챔피언'이라고 10만 명이 소리 높여 노래 부를 일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공간에서, 각자 다른 화면에 붙들려 있다. 그것이 동성애이든, 인종차별이든, 남녀차별이든, 소득불평등이든, 무엇이든, 우리는 양극화와 혐오의 세계에 살고 있다. 모두가 비평가인 세상에 살고 있다. 퀸은 세상의 모든 부적응자과 함께 소리 높여 노래 부른 마지막 밴드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부적응자였노라고 말이다. 이만큼 큰 목소리로, 이만큼 강렬한 울림으로 노래하는 뮤지션은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을 다시 그 웸블리로 데려갔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개봉 당시 국내에서 흥행했던 이유도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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