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는 미셸 윌리엄스의 섬세한 연기와 이를 효과적으로 화면에 담아내는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다. 정적인 화면 안에서 새로운 남자에게 흔들리는 여주인공 마고의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당연하지만, 그렇기에 더 낯설고 아프게 다가오는 진실을 건져낸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이내 낡은 것이 되고 만다'라는 것.
여주인공 마고에게는 일종의 불안이 있다. 바로 공항 공포증. 갈아탈 비행기를 놓칠까 두렵고, 내가 두려워할까 또 두려운 이 기묘한 불안은 곧 마고의 현재 상태를 대변한다.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을 놓치게 될까 두렵고,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 때문에 그 사람을 잡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될까 봐 두렵다. 늘 두렵고, 그 두려움조차도 두렵다. 마고를 둘러싼 일상은 평온하고 안정돼 보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만다.
우리 모두가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산다. 꼭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말이다. 내가 원하는 무엇에 제때 닿지 못할까 봐 두렵고, 나에게 온 기회를(내가 갈아타야 할 무언가를) 놓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이야기는 주인공의 알 듯 말 듯 한 행동과 심리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공감을 얻는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매일매일의 일들도 알 듯 말 듯 하니까.
영화는 시종일관 가늘고 불안하게 떨리며 진행된다. 마고는 자상하고 헌신적인 남편(세스 그린)과 매력적인 새 남자(루크 커비)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통속적인 불륜극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다소 권태로운 순간도 있고 때로는 무심한 남편으로 보이지만, 마고의 남편 루는 가정적이고, 유머러스하며, 크게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다. 이 귀여운 부부는 더 엽기적인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하기도 하고, 몰래 샤워 커튼 너머로 찬물을 들이붓는 장난을 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그들만 아는 공통의 코드가 있고, 두 사람의 일상은 언뜻 보기에 꽤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순간에도 균열은 생긴다. 어쩌면 그런 순간에 생긴 균열이기에 가는 틈새 하나하나가 더 아프게 다가온다.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는 순간에 나조차도 모르게 찾아오는 변화. 우리는 그런 변화에 더 어쩔 줄 몰라 한다.
처음에는 인력거를 끌고 새벽 바다로 나서는 그 남자를 애써 무시하지만, 마고는 결국 끌리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수록 이 행복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마음속에 싹트고, 그 싹은 점점 반발심으로 자라난다.
그때부터 마고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하지만, 영화는 격정적인 로맨스로 이 과정을 풀어내지 않는다. 마고와 새 남자 대니얼은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함께 놀이공원을 찾는다. 새로울 것 없는 일들이 모두 새롭게 느껴지고, 아직 손에 쥐지 못한 것들이 모두 이미 놓친 것처럼 느껴진다.
남편 루는 점점 대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마치 매일 요리하는 닭고기 같은 존재가 된다. 인간관계는, 특히 이성 간의 관계는 마치 갓 만든 말랑말랑한 무엇 같아서, 처음에는 맛있지만, 그냥 두면 금세 딱딱해지고, 처음 몇 번은 다시 데워서 먹을 수 있지만, 이내 못 먹는 것, 못 쓰는 것이 되고 만다. 마고와 루의 관계는 그렇게 못 쓰는 것이 되고 만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마고는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대니얼을 따라간다. 그 수많은 추억들은 모두 말 그대로 추억이 된다. 마지막으로 루가 샤워 커튼 너머로 찬물을 들이붓는 장난을 할 때 울컥하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은, 그 추억마저 놓치게 될 것이라는 마고의 두려움이 관객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고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대니얼과의 정말 눈을 의심케 할 만큼 파격적인 정사신이 펼쳐진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 동안. 마치 그 선택을 후회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쉼 없는 정사가 펼쳐진다. 마고는 새로운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얻은 것일까?
'우리도 사랑일까'가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어쩌면 끝내 알코올중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는 마고의 시누이가 했던 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빈틈이 있고, 그것을 다 미친놈처럼 메우면서 살 수는 없어.
물론 알코올중독자의 삶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조언 역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균열을 메우지 못한 상실감이 술을 부르고 중독을 부르고 가정 파탄을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뛰쳐나간 마고의 삶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손이 닿는 순간 모든 새것은 헌 것이 되고, 낡은 것이 된다. 지나간 시간은 모두 해본 것, 겪어본 것이 된다. 그리고 때론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삶에는 수많은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는 마고의 삶에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이 삶 자체라고 말할 뿐.
24시간 행복한 기분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사이에 뻔한 일상이 들어서고, 변함없는 그 일상은 우리의 내면에 빈틈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것이 깨어지지 않도록 겨우겨우 부여잡고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중간, 수영장에서 마고와 친구들, 그리고 늙은 여자들의 나체가 대비되는 샤워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은 낡아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육체까지도, 점점 낡고 병들어 소멸할 운명 위에 있다.
마고는 더 낡아버리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셈이지만, 그것이라고 영원할까? 영원한 것은 없다. 연애, 결혼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처음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만 같지만, 이내 빛이 바래고 만다. 새로운 것들을 동경해 그것을 손에 쥐고 나면, 그것 역시 이내 낡고 만다.
영화의 앞뒤로 같은 시퀀스가 배치되어 있다. 흔들리는 화면,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부엌 한 켠에 마고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한 남자가 서 있다. 그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결국 그게 누군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관계 없어지는 순간, 영화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 순간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그 흐릿한 환영을 좇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만은 낡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믿으며.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내가 어찌하든 결국 새로운 것이 과거의 것들을 대체한다고 흥얼거리며, 쉬지 않고 흔들리는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고 흐느적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