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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Apr 19. 2020

호박과 마요네즈 - 사랑과 꿈에 착취당하는 청춘들


청춘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태'이기도 하다. 청춘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좌절과 절망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상의 강요가 더해지면, 청춘은 종종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길도 방향도 모르는 청춘들에게 청춘은 결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루함에 가깝다. 우리가 청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건강함과 찬란함에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비루한 실체를 잠시라도 망각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청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가능성을 강요받는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서로가 주는 가능성에 끌리기 마련이다. 청춘은 상대방에게 끌리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의 희망이나 꿈과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현실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헛된 희망,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다. 청춘의 질곡을 다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그 시기의 사랑이 얼마나 유치하고 철없었는지, 청춘이 얼마나 우리에게 가혹했는지 깨닫는다.



츠치다는 뮤지션이 되려는 연인 세이치를 뒷바라지한다. 츠치다는 술집 일까지 해가며 돈을 벌지만, 세이치는 곡도 쓰지 못하고 집에 처박혀 백수처럼 지낸다. 세이치는 그라비아 모델을 보컬로 앞세워 활동하는 옛 동료들을 조소하지만, 정작 자신은 애인에게 빌붙어 사는 신세일 뿐이다. 츠치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한다는 생각으로 원조교제까지 하게 되고, 세이치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둘은 다툰다. 이후 세이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음악은 접고 갖은 잡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츠치다 앞에 옛 연인 하기오가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흔든다.


동명의 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호박과 마요네즈'는 서사보다는 이미지에 집중한다. 우리나라와 다른 문화권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츠치다의 선택들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데, 다만 이미지 위로 흐르는 츠치다의 독백을 통해 그녀의 속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헌신적인 사랑과 좌절, 세이치와 하기오 두 사람 사이에서 겪는 심적 갈등은 모두 츠치다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온다. 



'호박과 마요네즈'는 새로울 것 없는 사랑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사랑 때문에 갈등한다. 영화는 사랑의 끝자락, 혹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 오는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해낸다. 그것은 사랑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답이 없는 삶에서 오는 불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연인들은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른다. 츠치다에게 남은 건 세이치의 꿈을 뒷바라지하고 희생한다는 명분뿐인데, 세이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게으르게 멈춰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세이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츠치다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세이치에게 남은 건 알량한 자존심뿐인데, 여자친구인 츠치다가 몸을 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대로 된 음악을 하고 싶은데 현실은 따라와 주지 않고 여자친구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마지막 남은 것마저 앗아가는 관계가 되고 만다. 가진 것도 없고 남은 것도 없으니,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서로를 착취하는 것뿐이다.



츠치다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꿈과 이상에 헌신한 것뿐이다. 하기오와 재회했을 때 그녀는 사랑에 흔들린 것임과 동시에,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불안한 삶 그 자체에 의해 흔들린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관계없이 삶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단지 사랑이 식고 나서야 이를 깨달을 뿐이다. 


사랑은 삶의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는 마취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할 땐 전부인 것 같은데, 끝나고 보면 혼자 남은 삶이 쓰레기 더미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지나고 보면 꿈도 사랑도 청춘을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오프닝 신의 몽타주는 일상의 리듬이라기보다 '노동'의 이미지들로 이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 소리가 되고 리듬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위한 노래가 될 수는 없다.



영화는 마치 이별을 암시하는 것처럼 츠치다와 세이치를 종종 벽 사이에 둔다. 이별 장면에서도 두 사람은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파한다. 벽은 단순히 소통의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벽들은 결국 청춘들을 안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벽 안에서 서로 얽매여 있는 관계다. 물론 그들을 착취하고 있는 건, 서로의 존재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만든 헛된 기대다.


한 번도 제대로 노래를 만들지 못했던 세이치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곡을 완성해 츠치다에게 들려준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별다른 내용이 담겨있지도 않은 노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드디어 하나의 노래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세이치는 이 노래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밴드 멤버들과 무대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까? 알 수 없다.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픈 사랑의 터널을 지나고,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나만의 좌절과 절망을 지나는 동안 하나의 노래를 완성했다는 것만으로, 그는 한 뼘 더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로 잠시 다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아무 노래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다시 침묵의 시간, 새로운 노래를 만들 시간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츠치다와 세이치의 미래에 보내는 메시지임과 동시에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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