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마라 어지럼증

2006년 4월 응급의학과

by 외과의사 이준서

환자가 응급실에 오는 이유는 상당히 다양하다. 배가 아프거나 가슴이 아파서 오기도 하고, 목에 생선가시가 걸려서, 아이가 건전지를 삼켜서, 혹은 라면을 끓이다가 냄비가 엎어져서 화상을 입고 온다. 흉통이나 의식소실처럼 초응급인 증상도 있고,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급하지 않은 증상도 있다. 하지만 이곳 A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인턴들이 공통으로 가장 싫어하는 증상이 있다. 바로 어지럼증이다.


심한 어지럼증으로 응급실에 오는 환자가 생각보다 많다. 문제는, 다른 대부분의 증상처럼 의심되는 질환과 진료과가 깔끔하게 매칭이 안된다는 것이다. 귀의 문제로 어지럼증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이비인후과에 보고를 해야 하고, 뇌의 문제로도 어지럼증이 생길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신경과에 보고를 해야 한다. 이렇게 진료과가 애매한 증상이 어지럼증 말고 몇개가 더 있긴 하지만, 우리병원 응급실 인턴들이 어지럼증을 제일 무서워하는 이유는 신경과 1년차와 이비인후과 1년차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아무래도 응급실 인턴을 최대한 힘들게 하려고 작정한 것 같다. 둘다 환자를 어떻게든 안 받으려고 하고, 둘다 환자에 대한 보고를 하면 통화를 엄청나게 오랫동안 하게 된다. 전화로 하는 라운드1이 끝나면, 직접 내려와서 대면보고를 할 때 또 기나긴 라운드2가 시작이 된다.


오늘은 아침부터 좀 이상했다. 일단 아침에 출근하는데 복도에 환자가 한명도 없었다. 이런 일은 거의 없는일이라서 깜짝 놀랐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응급실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환자가 좀 적을 때 큰소리로 "오늘 응급실 조용하네요!"라고 외쳤다가 차지 간호사 (응급실 스테이션 가운데에 앉아서 교통정리를 하는 가장 주연급 간호사) 에게 호되게 핀잔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가 그 말을 뱉은 직후부터 중환자와 경증환자가 골고루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응급실이 상당히 조용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인턴들과 간호사들도 다들 속으로 '오늘 엄청 조용하네'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겠지만 다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전 내내 환자가 없었다. 자전거타다가 무릎이 까진 대학생과 근처 의원에서 보낸 맹장염 환자 밖에 없었다. 좀 불안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왔는데, 내가 환자를 받을 순서에 어지럼증 환자가 왔다. 오전 내내 너무 놀았다는 마음에 거의 반갑기까지 했는데, 초진을 하고 나서는 반가운 마음이 사라졌다. 이비인후과에 보고할 것이냐, 신경과에 보고할것이냐는 결국 증상과 신경학적 검사결과에 따라서 구분이 되는데, 이 환자의 증상은 놀라우리만치 딱 중간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응급의학과 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이비인후과 먼저 보고하고 안본다고 하면 신경과 보고해보자'라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 말은 인턴어로 해석하면 '이비인후과에 보고해서 한참 깨진후에 신경과 보고해서 또 한참 깨지면 된다' 라는 뜻이다. 정말 슬펐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비인후과에 보고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응급실 인턴입니다. 어지럼증 환자분 내원해서 보고드립니다. 63세 남자분이고 내원 2시간전에 발생한 어지러증 주소로 왔습니다. 과거력은...'


한참 전화로 보고를 했는데, 이비인후과 1년차는 끝까지 조용히 들었다. 이게 또 우리 이비인후과 선생님의 매력이다. 처음 보고하는 인턴은 '내가 보고를 잘 했나' 이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이건 그냥 엄청나게 활활 타기전에 1년차 선생님의 숨고르기일 뿐이다. 역시나 보고를 한 후 길게 혼났다. 결론은 '이비인후과 환자일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성과없는 보고가 끝나고, 신경과선생님에게 전화보고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어지럼증으로 이비인후과 보고했으나 신경과 보고를 권고받고 전화드립니다.'

'잠깐만'


신경과 1년차는 내 보고를 중간에 자르고, 이비인후과 전공의에 대한 저주, 응급의학과의 무능함, 그리고 나의 부족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나는 진지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신경과가 다시 튕기면 이비인후과와의 전면전이고, 신경과 1년차의 성격상 일단 환자를 봐줄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길고 긴 과정을 거쳐서 환자는 신경과에 입원했다. 그리고 나는 탈탈 털린 상태로 퇴근했다.


오늘같은 날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의학에 대해서 잘 모르고, 먹이사슬에 맨 아래에 있는 내가 환자의 진료과를 배분하는게 합리적인 시스템인가? 그리고 이비인후과 1년차와 신경과 1년차는 과연 자신들의 과 질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전화로 인턴을 깰 시간에 그냥 내려오면 안되나?


과의 특성이 아니고 사람의 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다른 병원은 신경과와 이비인후과 1년차들이 덜 무섭고, 다른과 전공의들이 인턴을 들들 볶고 있을 것이다. 내가 무슨과를 하든, 전공의가 됐을 때 나는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다짐 성공률로 봤을 때는, 나도 1년차때 비슷하게 행동하게 되지않을까. 우울한 날이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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