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호흡기내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긴장한 상태라서 그런지, 알람이 울리고 1초만에 일어날 수 있었다. 학교다닐때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어제 밤에 입을 옷을 양말과 넥타이까지 다 개어놓고 잠든 덕분에, 5시2분에 옷까지 완벽하게 다 입을 수 있었다.
환자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병원 OCS 프로그램을 열고 호흡기내과 명단을 확인해봤다. 재원환자가 52명이라고 돼있는데,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잘 감이 안 온다.설마 52명의 ABGA를 나한테 다 맡기는 건 아니겠지? 한 명을 랜덤으로 찍어서 더블클릭하고, 처방창에 들어가보았다. 낯익은 약 이름도 간간히 보였지만, 전공의선생님이 직접 타이핑한 간호지시처방은 90% 이상 외계어처럼 보였다. 어떤 과는 인턴이 직접 환자를 책임지는 주치의 역할도 한다던데... 첫달에 그런 과가 걸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아침 7시에 다른 내과 인턴들과 함께 의국장선생님을 만났다. 의국장은 내과 4년차 남자 선생님으로, 키가 좀 작고 파마머리를 한 분이었다. 원래 곱슬머리인 것 처럼 보이진 않았고, 미용실에서 파마를 한 느낌이었다. 내과 의국에서 인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것보다는 미용실의자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의국장선생님은 인턴들에게 '내과는 환자 파악이 중요하다', '잘 모르겠으면 꼭 물어봐라', '인턴들끼리의 팀웍이 중요하다'는 상당히 상투적인 얘기들을 해주었다. 머리로는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의대시절 밴드생활을 할 때부터 위계질서에 길들여져있던 나는 자동으로 존경+경청의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 내일부터 정식으로 호흡기내과 회진에 참여하게 된다. 병동콜만 받으면 되니 여유롭게 업무 파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의국장선생님이 나를 비롯한 몇 명의 인턴에게 특별 임무를 줬다. 전공의 간담회인지 뭔지 컨퍼런스가 있는데, 회의 준비를 위한 업무들이었다. 내가 받은 임무는, 연구동 전공의숙소에 있는 큰 물통을 병원 본관까지 옮기는 임무였다. 인턴 신분으로 처음 받은 임무라서, 완벽하게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이 일었다. 물통을 옮기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냐마는, 이런 사소한 일부터 완벽하게 해야 나중에 사람을 치료할 때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전 11시까지만 옮기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공격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즉시 물통 운반에 임했다. 물통은 숙소 탁자위에 놓여있었는데, 사이즈가 꽤 커서, 끌어안듯이 양쪽 손잡이를 잡고 뒤뚱거리면서 걸어야했다. 물통을 들고 연구동에서 나와서, 병원 본관까지 이어지는 길에 들어섰다. 학교 다닐 때 수백번 걸었던 길인데, 인턴 신분으로 걸으려니 기분이 새로웠다. 연구동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물통이 너무 무거워서 점점 걷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물통이 흔들리면서 차있던 물이 흘렀고, 셔츠와 가운이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병원 회의실에 도착해서 물통을 내려놓을 때는 셔츠 앞쪽이 꽤 젖어있었다.
회의실에는 의국장선생님과 다른 전공의선생님이 회의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은근히 임무완수에 대한 칭찬을 기대했는데, 의국장은 나를 보더니 '물통을 그냥 들고왔어? 그거 카트에 올려서 끌고 오면 되는데.' 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전공의선생님이 피식 웃는 듯했다.
오후에는 병동콜을 받았다. 휴일이었지만 모든 인턴들이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호흡기 콜만 받으면 됐다. Tracheostomy (기관절개술) 드레싱 콜이 있었는데, 이걸 '포텍스 드레싱'이라고 불렀다. 4x8 거즈나 Y 거즈를 사용해서 tracheostomy 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흡수될 수 있게 잘 드레싱을 해주면 되는 거라서 어렵지 않았다. 드레싱을 하다보면 어쩔수 없이 tracheo를 좀 건드릴 수 밖에 없는데, 환자 중에는 조금만 건드려도 심하게, 오랫동안 기침을 하는 환자가 있었다. Ventilator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지 않은 환자의 경우, 기침을 하면 tracheo를 통해서 가래와 침이 튀었고 내 얼굴과 가운에 묻었다. 한번 당하고 나니 왜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나도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안면을 튼 다른 내과 인턴 두명과 같이 직원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카레와 돈까스가 나왔는데, 너무 맛없었다. 조금만 걸어서 근처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먹으면 훨씬 맛있는 돈까스를 먹을 수 있는데,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좀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