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호흡기내과
내일 인턴으로 A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감이 잘 안온다. 이러다보니 무서워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마음에, 오늘 오후에 친한 선배에게 전화해서 뭘 좀 준비해서 들어갈 것은 없는지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다. "잘 나오는 볼펜 몇개 갖고 들어가." 그래서 일단 볼펜은 챙기긴 했다.
3일전부터 인턴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우리병원 계열 인턴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는 병원 갯수가 많다) 단체로 관광버스를 탔다. 집에 들리지 않고 OT 장소에서 바로 병원으로 가는 스케줄이라서, 큰 캐리어를 다들 한두개씩 가지고 있었다. 여자선생님 중에는 이사가는 것처럼 엄청난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한두명 있었다. 버스를 2시간 타고 어디 공기좋은 수련원에 도착했고, 강당에 집합해서 조를 짜고 소개하고, 병원장님의 훈화 비슷한 말씀을 들었다. 병원장도 교장처럼 지겨운 소리 많이 하는구나. 활동복 비슷한걸 지급 받았는데, 바지가 신축성이 좋고 까만색이라서 병원에서 근무할 때 사용하기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 내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A대학교를 나와서 A병원에 근무를 하는거라 사실 학교 다니는 내내 당연히 A병원을 갈거라는 생각이 있었따. 그런데 타 대학 출신 선생님들도 우리병원에 많이 온다는걸 알게 됐다. 친해진 선생님들 몇명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사람 사는게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의아했던건, 오리엔테이션을 3일이나 했는데 그다지 중요한 내용을 배운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중요한 얘기는 많이 했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한 거겠지. 오늘 (마지막 날) 오후에는 다같이 강당에 모여서, 배정받은 각각의 병원으로 흩어지기 전에 작별인사를 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형이 나에게 '건강하게 지내라. 아프지 말고.' 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났다. 진짜 이제 아프면 안되는구나. 학교 다닐땐 아프면 그냥 누워서 자면 됐는데.
어제 저녁에는 회식이 있었다. 나는 학교다닐때 밴드를 했기 때문에, 윗사람에게 굽신굽신하는건 자신있다. 술자리가 시작되면, 선배나 교수님들보다 술을 빠르게 많이 마셔야 하고, 윗사람 한분 한분을 찾아가서 '잔을 드리는' 거룩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윗사람 중에는 간혹 잔을 받지 않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아주 기뻐하면서 나를 옆에 앉혀놓고 자기 얘기를 해준다. 드물게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는 분들도 있다.
같은 인턴 중에 나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애들도 있지만, 술자리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만 있는 애들도 있다. 드물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 애들이 있다. 정말 이해가 안간다.
2차가 끝나고 인근에 노래방을 갔다. 노래방에서 좀 충격적인 모습을 봤는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교수님이 젊은 여자교수님을 얼싸안고 춤을 췄다. 다들 좀 어쩔줄 몰라하는 분위기였는데, 여자교수님은 좀 모든 걸 포기한듯한 표정이었다. 나 말고도 한 8명 정도 같이 있었는데, 예비 인턴 중 아무도 수련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님에게 "교수님, 그만 하시죠" 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기분이 굉장히... 찝찝했다. 이번엔 좀 무방비로 당했는데, 앞으로 이런 일을 목격하면 용감하게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오후에 관광버스를 타고 A병원에 도착해서, 숙소를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숙소를 보고 경악했다. PK 시절 학생실습을 돌면서 이런 저런 숙소를 겪어 봤지만, 여긴 정말 깜짝 놀랄정도로 거지같다. 시설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청소 자체를 안하는 것 같다. 침대 시트가 제대로 씌어져 있지 않고, 곳곳에 버려진 환자명단이나 검사결과지, 장갑, 면봉, 마스크 등등이 굴러다닌다. 어두컴컴한 큰 방에 2층 침대 3개가 놓여있고, 6명이 같이 쓴다. 나는 문에 가장 가까운 침대에 2층을 배정받았다. 이런 거지같은 공간의 장점을 굳이 찾자면, 숙소에서 놀고 싶은 생각은 별로 나지 않을 것 같다. 주로 병동에서 시간을 보내든지 해야겠다.
내일은 정식으로 인턴 근무를 시작하는 첫날이다. 나는 호흡기내과를 배정받았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ABGA (동맥혈가스검사) 를 많이 하는 곳이라 초반엔 좀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한다. 7시에 내과 의국장 선생님을 만날 예정이라서, 5시반 쯤 일어나서 씻고, 호흡기내과 명단이라도 좀 들여다볼 생각이다. 아침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입을 옷을 넥타이와 양말까지 모두 정해서 고이 개어 놓고 침대에 누웠다. 남자 인턴들은 역시 OT에서 지급받은 검은 바지를 많이 입을 예정인가보다. 침대가 좀 지저분하고 잠자리가 바뀌었는데도, 거의 자리에 눕자마자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