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GA 정맥혈 사건

2006년 3월 호흡기내과

by 외과의사 이준서

5시에 일어나서 스테이션에 도착하면, 간호사들이 ABGA가 필요한 환자들의 바코드를 출력해둔다. 그럼 나는 바코드 갯수에 맞게 10cc 주사기를 준비하고, 모든 주사기에 헤파린을 조금씩 재 놓는다. 이렇게 준비가 끝나면 출발하는데, 7시 컨퍼런스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환자의 ABGA 결과가 나오게끔 검사를 마쳐야 한다. 스테이션에 주사기를 갖다주면 사원님이 검사실까지 들고 가야하고, 검사를 돌리는 시간이 있으므로, 늦어도 6am 전까지는 모든 환자의 채혈이 끝나는게 좋다.


지금 호흡기 재원환자는 50명 정도되는데, 아침에 ABGA가 필요한 환자는 20명 내외이다. ABGA를 하는 방법은 대표적으로 손목에 있는 radial artery (요골동맥) 에서 피를 뽑는 방법과 사타구니에 있는 femoral artery (대퇴동맥)에서 뽑는 방법 두가지가 있다. 향후 투석할 가능성이 있어서 arteriovenous fistula (동정맥루)를 만들수도 있는 사람은 손목에서 뽑으면 안되고, 심혈관 스텐트삽입술 등의 중재 시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사타구니에서 뽑으면 안된다.


Femoral ABGA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환자 바지를 내려야 한다는 (환자와 의사 모두의)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radial artery에서 간단하게 할수 있다면 제일 좋다. 찌르기 전에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찌를 부위를 알콜로 소독한 후에 왼손으로 맥박을 확인한다. 쉽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어떤 경우에는 희한하게 맥박이 느껴지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도 피가 안나온다. 가장 짜증나는 경우는 피가 아주 소량 나오다가 마는 경우이다. 이럴 때는 스테이션에 전달해줘봤자 검사실에서 샘플이 부족해서 결과가 안나온다고 연락이 오기 때문에, 다시 찌르는게 마음편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번 혈관을 찔렀기 때문에 찌르는 부위가 부어오르게되고, 찔러도 혈관에 진입해서 나오는건지, 새어나온 피가 나오는건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어떤 환자분들은 두번째 찌를때부터 이미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고 있다.


그래도 며칠동안 매일 단련을 했더니,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제없이 시간을 맞출수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있었다. 7호실에 계시는 D할아버지는 병동 간호사들이 엄청 무서워하는 분이다. 피를 뽑거나 활력징후 측정을 할 때 본인이 기분이 좋으면 마지못해 허락하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간호사의 손을 쳐내거나, '내몸을 건들지 마!'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 교수님 회진 때는 다른 사람같이 친절하다. 아무튼 새벽에 피를 뽑아야 하는 내입장에서는 D 할아버지의 바코드가 있는 날은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다. 두번 찌르게 되면 깊은 한숨을 푹 쉬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이상하게 잘 안뽑히는 날이었다. 어떤날은 무진장 잘 뽑혀서 6시반 쯤에 다 끝나는 날도 있다. 이런 날이면 컨퍼런스까지 무려 30분(!)의 여유시간이 있으니, 응급실 앞에 벤치에가서 자판기커피를 뽑고, 여유롭게 담배를 한대 피기도 한다. 어떤 날은 더럽게 안 뽑혀서 7시를 넘어가는데, 이럴 때 스테이션 간호사들이 빨리 주사기 넘겨야 한다고 닥달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오늘은 안 뽑히는 날이었는데, D 할아버지 손목을 두번 실패했다. 할아버지의 기분이 점점 안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지를 내려서 대퇴동맥을 찔렀는데, 아주 진한 까만색의 정맥혈이 채혈되었다.


나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 할아버지한테 혼나고, 간호사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될때까지 동맥혈을 뽑는다. 2. 아무것도 모르는척 정맥혈을 그대로 스테이션에 전달한다. 사실 깊이 고민을 하지도 않고, 다른 환자들의 결과라도 컨퍼런스 전에 나와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맥혈을 그대로 전달했다.


문제는 컨퍼런스 도중에 터졌다. 교수님들끼리 ABGA 결과에 대해 이런 저런 논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장 주니어 이신 K 교수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인턴선생님, D씨는 정맥혈 이었나요?'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네, 정맥혈이었습니다.'


갑자기 교수님 3분과 펠로선생님, 그리고 전공의선생님 2분까지 다같이 빵 터졌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실실 따라 웃었다. 어쨌든 혼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다. 회진이 끝나고 응급실 앞에서 펠로선생님께서 다 웃었던 이유를 설명해주셨다. 인턴이 채혈을 할 때 정맥혈이 확실하면 당연히 다시 채혈을 해야 되는건데, 그렇게 자신있게 '정맥혈 맞습니다!'라고 대답한게 내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바쁠때 정맥혈이 뽑혀도 컨퍼런스에서는 끝까지 동맥혈이었다고 우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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