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에게 속았다

2006년 3월 호흡기내과

by 외과의사 이준서

어제 밤에는 좀 속상한 일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일을 하다가, 10시쯤 학교때부터 친했던 친구들 몇 명과 작당하여 치킨을 시켰다. 다들 아직 keep이 풀리지 않아서 (인턴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는 당직과 오프 구분없이 다같이 병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당직을 서는데, 이걸 keep이라고 한다) 맥주는 못 시켰다. 아쉬운대로 콜라 사이다와 함께 치킨을 먹었는데, 인턴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과에 따라서 하는 일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벌써 주치의처럼 병동 콜을 받는 친구도 있었다.


11시쯤 됐을 때 5층 병동에서 PCI (관상동맥 중재시술) 시행받은 환자 드레싱 리무브 해달라는 콜이 왔다. PCI를 하고 나면 카테터를 넣었던 대퇴동맥에 동맥류 생기지말라고 두꺼운 압박드레싱을 하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고나면 제거해줘야돼서 인턴에게 콜이 온다. 원래 심장내과 인턴이 하는 일인데, 아마 심장내과 인턴이 중환자 처치를 하고 있어서 나한테 콜이 넘어온 것 같았다.


5층 스테이션에 가니 간호사가 병실번호와 환자이름을 알려줘서, 드레싱 리무브를 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환자에게 갔다. 병실에 불이 꺼져있어서, 환자 침상 위에 있는 개별등을 켜고 환자를 살살 흔들어서 깨웠다. 사타구니에 있는 압박 드레싱을 떼어 드리겠다고 하자, 환자가 "저녁에 다 떼었는데요?" 라고 했다. 확인해보니 정말 압박드레싱이 제거되어 얇은 반창고로 교체되어 있었다. 괜히 깨워드려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나왔다.


병동 간호사에게 "이미 압박드레싱 제거 돼있는데요?" 라고 말을 했더니, 간호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됐어요, 그럼." 이라고만 하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일부러 나를 고생시키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착오가 있었다면 미안하다고 한마디 할 수 있는건데.


사실 오늘 나에게 있었던 일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정말 하찮은 일이었다. 우리가 인턴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건의 사건이 있었다. 한 인턴은 환자에게 시술을 하면서 실수를 해서 보호자가 병원장 나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건이 있었다. 또 다른 인턴은 일주일 내내 병동 간호사, 환자 및 보호자들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문제를 만들더니 열흘도 못채우고 병원을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꽤 큰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여러가지가 설명이 되었다. 선배들의 인턴 생활 얘기를 들어보면, 아주 극단적으로 양분화되는 느낌이 있었다. 간호사들과 사이좋게 지냈던 선배들의 경우 서로 잘 도와가면서 하면 인턴 생활이 훨씬 쉽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간호사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선배들의 경우 '쓸데없이 잘해주면 모든 일이 나에게 온다'는 등의 얘기를 했다. 오늘 같은 일이 있을 때 어떤식으로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간호사들과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으면서 일할지 결정이 되는 것이겠구나. 그리고 다른 선배들의 경우를 봤을 때, 인턴 때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전공의 때의 관계도 결정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병원에서 일하다보면, 직원들끼리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학생실습을 돌때도 그런 일을 자주 목격했고, 인턴을 들어온 후에도 여러번 봤다. 서로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봤고, 의사나 간호사가 선배에게 혼나서 환자나 보호자가 볼 수 없는 구석에 숨어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경우도 봤다. 나는 별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이런 갈등과는 무관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충분히 연루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 그 자리에서 간호사에게 화를 내거나 티격태격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간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턴 시절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나는 지금 어디까지나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됐지만, 정신없이 일하다보면 1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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