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하루

2006년 3월 호흡기내과

by 외과의사 이준서

오늘 아침 컨퍼런스를 하는데, 넘버3 교수님이 문득 '근데 언젠가 부터 환자명단에 현재 투약중인 항생제가 표시되네?' 라고 하셨다. 넘버1, 넘버2 교수님이 '항생제 넣으니 좋다'며 한마디씩 하셨다.


여기까지 나는 멍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펠로선생님이 '인턴선생님이 명단에 추가했어요.'라고 하셨다. 사실 내 전에 있던 2월턴 선생님이 항생제를 추가한거라서, 가만히 있으면 거짓말하는거나 다름없었다. '제가 한게 아니고, 전임자 선생님이 칸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릴까 고민했는데, 왠지 펠로선생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평가받는 입장에서 칭찬을 들을 기회를 버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교수님들이 '인턴 선생이 일을 잘한다'며 한마디씩 더 하셨다.


칭찬을 들은 건 좋았는데, 역시 꽤 찝찝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틀린 말을 한 펠로선생님이 야속하기도 했고, 좋은 점수를 받겠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 내 자신도 한심했다. 인턴 오리엔테이션 할때 할아버지 교수님이 젊은 여자교수님과 춤을 추는 걸 본 뒤로 '나중에 양심이 찔릴 것 같으면 손해보더라도 나서자'라고 결심했었는데. 왠지 앞으로 병원 생활하면서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은 안좋은 느낌이 들었다.


회진끝나고 1년차선생님과 응급실 앞에서 담배를 폈다. 1년차선생님은 왠지 진실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6층 욕창드레싱을 했다. 이 할아버지는 6층에서 유명한 분이다. 입원한지는 4개월 정도 되신 것 같은데, 여러 과를 전전하시다가 현재는 호흡기내과 입원중이시다. 엉덩이 욕창이 커서 주 3회 욕창 드레싱을 하는데, 한번 하는데 50분정도 걸린다. 결손부위가 커서, 드레싱을 모두 제거하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처음보는 드레싱 제재들을 준비해서 순서대로 집어넣는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전과정을 멸균이 유지된 상태로 해야 되다보니 더 오래 걸린다. 보통 인턴 드레싱은 간호사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데, 이 할아버지 드레싱은 유일하게 간호사가 도와준다. (너무 오래걸리고, 써야하는 드레싱 제재가 다양하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지금까지 이 할아버지 드레싱을 한 7-8번 정도 한 것 같다. 처음에는 드레싱 자체를 해본적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고, 시간도 거의 한시간 반 정도를 했다. 다 하고 나니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제는 많이 빨라져서, 잘되는 날은 40분만에 끝내기도 한다.사실 이런 드레싱을 6인실에서 하면 냄새나 소리 때문에 다른 환자들이 싫어한다. 이 할아버지는 다행히 1인실에 계셔서 다른 환자 눈치볼 필요없이 차분히 할 수 있어서 좋다. 주 보호자가 할머니(부인분)이신데 굉장히 점잖으신 분이다. 딱 봐도 병원 생활 초짜로 보이는 새파란 의사가 들어와서 간호사한테 이것 저것 물어보면서 한참 드레싱을 하면 싫으실 법도 하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처음 드레싱하고 나가는 내 가운 주머니에 냉장고에서 꺼낸 과일주스와 빵을 넣어주면서 '힘들텐데 고생했다'고 해주셨다. 의사면허 따고 보호자에게 처음 받는 선물이었는데,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드레싱을 다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따라 나오셨다. 처음보는 따님도 함께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내일 요양병원으로 옮기기로 하셔서 오늘 드레싱이 마지막이라고 하시면서 '그동안 너무 감사했다'고 해주셨다. 따님께서도 '그동안 힘써주셨다고 말씀 많이 들었다,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고개숙여 인사를 하셨다.


인턴생활을 시작하고 병원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아서 환자도 무섭고, 전공의 선생님들도 어렵고.. 여러모로 마음이 힘들었다. 그런데 두분께서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갑자기 선 자리에서 눈물이 나왔다. 너무 당황해서 안녕히 가시라고 제대로 말씀을 드리지도 못하고,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화장실에 앉아서 좀 울었다. 그동안 할아버지 드레싱을 하면서 대충 대충 했던 날도 있었는데. 일이 밀리는 날은 '이 할아버지는 도대체 계속 사는 의미가 뭐야'라고 속으로 욕한날도 있었는데. 인턴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정말 쓰레기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울었다.


오늘은 좀 이상한 하루였다. 내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는게 이렇게 힘들구나. 전공의, 펠로를 거쳐서 교수까지 된 분들은 이런 과정을 다 겪었겠지? 나중에 되돌아보면 지금은 치열했던 시절로 기억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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