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떨어진 후기

이제 뭐하지

by 준성

마지막 글을 쓰고, 대학원 준비에 돌입했었다.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시간이 부족한 건 당연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공고가 올라온 상황에서 지원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로 대학원 준비란 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도 해보고, 비전공자로써 공부를 할 만 할지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와중에 굳이 서울대여야 했던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세부전공을 전공한 교수가 서울에는 드물었고, 그렇다면 가장 좋은 곳으로 지원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감당해야할 등록금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서울대 철학대학원 하나만 준비를 했고, 가능성의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곳을 준비한다는 도취의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경험해보지 않은 분야는 늘 자신감이 넘치기 마련이다. 미친 더닝크루거 효과 탓이다.


그런데 결심을 하고 나니 정말로 문제들이 생겼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준비해야할 것들이 까다로웠는데, 영어 성적 최저 점수와 전공 시험, 제2외국어 시험 등이 있었다.


나의 경우 영어성적이 시급했다. 토익은 모의고사 두번 풀고 받은 780점이 있었다. 근데 기간도 만료되었을 뿐더러, 서울대에서는 토익은 보지도 않는단다. 토플과 텝스를 봐야했다. 나는 텝스를 택했다.

텝스는 토익하고 또 달랐다. 슬슬 읽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327점을 넘겨야하는데, 이건 뭐 지문을 독해해도 선지에서 꼬아버려서 시간이 두 배가 걸렸다. 처음 모의고사를 풀었을 때 대학원 지원도 못해보고 포기하겠구나 싶었다.


근데, 결과적으로는 2주 공부하고 기준 점수를 넘겼다. 377점으로 운이 좋았다. 상대평가라, 문제가 어려운 것이 차라리 나은 듯 하다. 영어 베이스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 수월할 것 같다.


그 뒤로는 자소서, 연구계획서, 전공시험, 제2외국어 시험까지 한번에 준비를 해야했다. 서울대는 특이하게 면접까지 보고 1차를 거르는데, 1차 결과가 나오고 이틀 뒤에 전공시험과 제2외국어 시험이 있어서, 한꺼번에 준비를 해야하는 괴랄한 일정이었다.


나름 열심히 했다. 굳이 세세하게 어디까지 했다고 얘기할 필요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다. 그럼에도 준비가 덜 되었다는 생각에 준비기간 내내 잠을 못잘 정도로 신경을 썼다. 본 전공 교수님들께 죄송하지만 4년 동안 한 것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했다. 연인이 지금까지 옆에서 본 모습 중 제일 열심히 살았다고 하더라.


근데 결과적으로는 떨어졌다. 평생 이토록 치욕스러운 면접은 처음이었고, 나는 몇 마디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무시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무시받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살아온 과정은 종착지가 철학 대학원이어야만 하는 설득력이 떨어졌고, 나 또한 그렇다고 느꼈다. 떨어지고 며칠 동안 수치심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회복했다. 나는 준비가 덜 된 것이 맞았고, 대신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또 있었으니까.


우선, 철학 공부는 꽤 재미있었다. 교양이 아니라 전공 수준에서의 공부도 재미있었다. 확실히 법학이 아니라 철학을 복수전공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공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몰입의 경험은 지금까지 갈팡질팡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나도 뭔가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두 번째로, 기한이 있는 준비는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영어도, 서류 제출도, 면접도 시험도 계획을 세워서 준비할 수 있었다. 하나씩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마음으로 임했고,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세 번째로,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험을 정말정말정말 싫어하던 나였는데, 하고 싶은 것이 생기니까 자발적으로 영어와 전공을 몇 시간씩 공부를 하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그럼에도, 내가 대학원까지 가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도 생겼다. 나는 1인분의 삶을 살고 싶은데, 교수가 되기까지 그러한 삶을 살기 어렵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공부와 대학원, 석사와 박사, 교수 임용, 인문학... 공부가 너무 재밌는 것과는 또 별개로, 현실적인 그 삶을 견딜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미 그 길을 치열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각오와 다짐은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다음 글에서 더 자세하게 쓰겠지만, 요즘은 그냥 쉬고 있다. 원래는 다시 엄청나게 뭔가를 찾고 진로를 정하려고 하고 아득바득 했었는데,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그냥 책 읽고 드라마 보고 있다. 모아 놓은 돈 맛있는 거 먹는 데에 써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인과 전화를 하다가, 야망이 큰 연인을 뒷받침 해주는 가정주부의 삶도 난 행복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쳤다기보다, 그냥 편안하다. 뭔가에 진심이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불행해야 하는데, 왜 불행하지 않은지 몰라서 조금 불안한 것은 있다.


오히려 이상하게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갖지 못했던 사소한 행복을 찾아내고 있다. 며칠 전엔 끝내주는 고추장 된장국을 만들었는데, 연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정말 뿌듯했다.


모르겠다. 난 어쩌면 지나치게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큰 범주에서 내 몫을 하면서 산다면, 세부적인 것은 어떻든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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