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하나쯤 품고 사는 문장 있잖아요?
찾아 헤매던 정신 같은 게 있다.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는 내가 한계상황에서도 붙들 수 있는 신념 같은 것.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의 말에 휘둘리는 것이 싫어서 마음 깊숙히 꽂아넣고 싶었던 것.
그러한 것을 찾아서, 무언가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것이 글, 소설, 영화, 브랜드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전공 수업 중, 교수님이 자신의 신념이 뭔지 한 명씩 돌아가면서 말하게 시킨적이 있다.
이런 걸 왜 시키나 싶었는데, 사실 은근 내 차례를 기대했다.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답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도 이런저런 생각들을 달고 살았고,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놓은 것을 그대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옳다고 생각한대로 사는 삶'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옳은 삶이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이때 옳음의 기준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옳음이란 진리, 진실과는 거리가 있으며, 본능적인 이끌리는 태도에 좀 더 가깝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으며, 다만 그것대로 행동하는가가 중요하다.
별다른 반응없이 내 차례가 지나갔지만,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나름대로 내가 생각해오던 것을 남들 앞에서 처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2병스러웠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도 현재는 많이 변했지만(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전제되는 첫 번째 생각, "내가 옳다고 생각한대로 사는 삶"에 대한 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무엇이 옳은가?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이건 또 다른 문제다.
옳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고, 이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이 다치고 죽고 심지어는 한 문명이 멸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옳은 삶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 옳음에 대한 기준이 어디에서 왔느냐와는 별개로, 자신이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사느냐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의식과 의식적 자아의 통합과 행복에 큰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각하지 못해도 뭔가에 대해서 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 자신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직감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개인의 옳음의 기준을 만들며, 누군가는 그것을 사회적 기준과 얼마나 일치시키는가를 목표로 살고, 누군가는 나아가 자신만의 기준을 추구하게 된다.
나는 지금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사는 것과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나은지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어떤 기준이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자신이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세상과 나의 행복에 더 중요하고 옳다고 판단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그 사람에게 옳은 것이다.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그에게 더 이끌린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내면에서 일치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만 살지 못한다. 나는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피스타치오 팝핑 캔디 프라푸치노를 시키고 싶은데, 아메리카노를 시켜야 덜 튄다는 생각에 카페인도 못 먹으면서 아메리카노를 시킨다면, 그건 이끌리는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일상적인 예를 들었지만, 그것이 생명과 사회적인 관습에 관한 문제라면, 무엇이 옳은 걸까? 무엇이 개인을 행복하게 할까?
이렇듯 우리는 일상생활에서조차 매우 다양한 방해를 받는다. 더 큰 문제들에서는 개인적인 이상이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고,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결론을 부정할 수도 있다. 무언가 삶이 부대끼고,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라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되는 것인가.
여러 방해에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반드시 다음의 문장과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반항적인 말이다. 고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겸손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문장은 초기 회기 유나이티드의 슬로건이었다. 장호형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기 유나이티드를 통해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했고, 우리 둘 다 이 말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번도 제대로 쓰인적은 없다. 회기 유나이티드가 발행하던 콘텐츠와 대조적으로 너무 진지하고 컨셉츄얼한 탓에 사람들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이 그러함에도,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이 현재 속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선언이다. 앞부분에 다른 어떤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선택을 좌우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이다. 남들이 다 옳다고 하는 것과 생각이 다르다면, 기꺼이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집이 비난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는 문장이다. 최근 유행했었던 '꺾여도 계속 하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것만이 개인의 문제를 구원할 유일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 개인과 사회의 일치, 그 옳음에 대한 기준이 어디에서 왔는지 따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남들 다 짜장먹는데 짬뽕이 땡길 때 짬뽕을 먹어야만 한다면, 회식자리에서도 짬뽕을 시켜야만 한다. 반면 회식의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함께 짜장을 시키는 배려가 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눈치 밥말아먹었더라도, 자신이 정말로 그런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인한 피해와 눈초리 쯤은 감당해야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유일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대로의 논리를 따르면,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도 통용될 수 있다. 80억 명 만큼의 다양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생긴다. 사회적인 행위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다. 어느 순간 그렇게 개인의 옳음과 사회적 옳음이 뒤섞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끝까지 자신의 옳음만 추구한다면, 그 사이에서 어떤 합의도 이끌어낼 수 없다는 말이다. 히틀러와 연쇄살인마는 나름의 옳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잔인한 목적을 실현시키는 것이 그들의 옳음이라면, 법적으로 제재하는 것 외에는 이들의 당위를 처음부터 꺾을 방법은 없는 걸까? 그들의 옳음을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 문제는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는데, 지금 당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역시 그러한 자신의 '옳음'이 언제든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옳음과 틀림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합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옳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옳음은 쟁취의 대상일 뿐이다. 뫼르소를 판결한 배심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엉뚱한 곳으로 힘을 쏟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퍽 잔인하고 되도않는 소리 같지만, 쉽게 반박하기가 어렵다. 공동체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다른게 뭐지... 싶기도 하다. 여기서 나의 논리는 길을 잃는다. 당위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남을 굴복시킴으로써 옳음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개인의 옳음은 남의 응원이 필요 없고, 두 번째로 공감을 통해서 감화되는 것으로만 나의 옳음이 전달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란하고 잔인한 방식의 통합은, 동의와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다양한 문제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조리는 어차피 삶에서 떼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끝까지 반항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영원한 내면의 갈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일 수 있다. 나만의 옳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알지만 지금 당장만큼은 그 옳음을 행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마음가짐. 내 자신을 알고, 부조리하고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담겼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이 좋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신념 위에 세워진 브랜드가 누군가에게 소비된다면, 얼마나 뿌듯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