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와 부조리 그리고 유머
반골: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 순응하거나 따르지 아니하고 저항하는 기골. 또는 그런 기골을 가진 사람.
홍대병: 주류 문화를 배척하고 비주류를 선호하며,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는 점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사람은 흐름을 거스르기가 어렵다.
시대를 앞서 갔다는 평가를 들은 작품도 결국 언젠가 받아들여지는 시기를 맞게 된다.
이렇듯 거스르고자 하는 의지는 큰 강물 같은 흐름속 작은 발버둥에 지나지 않을 텐데, 왜 시대 흐름을 따르기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왜 하필 나일까.
얼마 전 좋아하는 분을 만났다.
왕래는 거의 없지만, 자기 것을 하는 멋있는 분이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 내가 하는 방황에 대한 지지와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유년시절에 대한 자기 이해가 방황의 길을 잡아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 유년시절인가. 그것이 왜 중요할까.
어릴 때의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에 움직였는지 아는 것.
어떻게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껴서 행동했는지 아는 것.
결국 '왜'라는 질문과 그 답들을 타고타고 올라가서 '그럼 왜 태어났어? -> 몰라.' 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유년시절의 내가 어땠는지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0에서 1로, 뭔가가 갑작스럽게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직/간접적으로 살아온 삶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와 의지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만의 '옳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자 신념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멋있고 좋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만났던 분과의 대화 이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어릴 때의 내가 내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 그것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 가지의 일관된 태도가 있었다.
바로 '왜 꼭 그렇게 해야하지?'와 '왜 하면 안 되지?'의 반항심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반항심이 투철한 아이였다. 꼭 틀린 문제를 들고가서 선생님이 문제를 잘못 내었다며 따지고, 굳이 시비를 거는 형들한테 딴지를 걸며 싸움을 일으키고,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한다고 말하는 엄마와 갈등을 일으켰다. 나는 내가 마음이 동해야 납득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항심을 갖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나만의 동기를 찾고자 하는 순수한 즐거움이자 자기 정체성이었다.
시간이 지나 머리가 커지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반항심은 많이 죽었다. 그것이 사회적인 행동이기도 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축구를 하면서는 집단을 나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나의 반항이었고, 그래서 쉬웠다. 돌아보면 축구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게 옳다는 강력한 의지 같은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왜 축구선수는 공부 병행을 못해?' '축구만 하다가 인생 꼴아박고 싶지 않아'와 같은 반항심이 엄청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반항심에는 나의 타고난 기질도 있겠지만, 집안 분위기의 영향도 한 몫 한 것 같다.
나는 부모님을 영웅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이 담긴 인생사를 공유받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적은 절대 고분고분 사회적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는 행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처럼 되고 싶었다.
다른 한편, 부모님께 장착 되어있는 선함과 신앙, 정직함이라는 오래된 가치관에 대한 반발심이 점점 커졌다. 나는 무엇이든 내가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고 깨닫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부모님이 겪어본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엄마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내 방식대로 살게 좀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아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많이 상처 입히기도 했고, 서로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다.
우리집은 전혀 엄격한 편이 아니지만, 선함과 정직성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다. 그것은 신앙과도 늘 연관이 있고, 부모님의 삶 자체를 깨끗하고 올바르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옳은지와는 별개로, 그들만큼 완벽하지 않은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러니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어떤 삶의 방식이든 내가 직접 선택하고자 하는 양가 감정이 자라오는 내내 충돌하며 혼란을 야기했던 것이다.
언제나 선함을 추구해야 하는가? 선함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가? 그것이 실제로도 가능한 일인가? 나는 왜 사는가? 왜 죽지 않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답이 주어지지 않는 질문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스피릿, 라이온킹, 뮬란, 이집트 왕자를 내내 돌려보았다. 이 주인공들은 모두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이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 불안을 극복했다. 나는 이들에게조차 그런 태도를 배워왔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자유는 늘 중요한 문제다. 외동아들이라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내 일거수일투족은 늘 부모님의 손바닥 안이었다. 방문 한 번 "쾅" 닫아본적이 없는 나의 첫 대대적인 반항은 부모님 몰래 교회를 가지 않은 것이었다. 집은 난리가 났다. 결국은 신앙에 있어서 부모님은 한 발 물러났다.
그나마 언제나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는 대화를 했다. 이 대화가 나의 반항심을 내면적으로 조용하게 표출하는 것을 도와줬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오토바이 타고 술 담배 다 하는 야무진 청년이 되었을 것 같다. 정말 삐뚫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나의 노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선함에 대한 이야기와, 어릴 때 몸으로 습득한 일말의 신앙심 그런 것들이 내가 아주 엇나가게 하지는 않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반항심, 좋게 말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의 시선과, 그러한 삶의 방식을 모두 직접적으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용기의 부족이 한 데 어우러져 창작에 발을 딛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창작은 사회적 금기, 발칙함, 도발, 반항적인 스탠스를 제한 없이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창작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전에 "왜"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를 다루는 태도이니까. 창작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나 다움'을 집어 넣을 수 있는 '무엇'이 생긴 것이다. 언젠가 이것보다 더 깊은 감정, 더 깊은 원동력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 단계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을 발견한 것만도 큰 수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고개 숙이고 순응하는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이래야 해, 저래야 해. 그런 것들에 의문을 던지는 게 좋다. 반항을 위한 반항이 아니라, 기존 체제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를 추구했던 건 내게 그러한 반항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아이러니, 부조리, 유머.
이 장치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인정하게 하고, 반항심을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는 도구들이다.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트는 것이 재밌다. 부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유쾌하게 뛰어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적 금기를 건드리는 발칙함, 도발적인 태도로부터 시도와 도전이 나온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그런 영화와 책을 읽어왔으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태도에서 출발한 기획과 도전은 성공 유무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왜'에 대한 생각이 뒷받침 되니 추진력은 그냥 생기는 것이었다. 살아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니 중요한 순간마다 그런 태도가 있었고, 그러한 태도를 스스로 '좋아'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사고하기를 좋아했다. 왜 안 되지? 안 되면 내가 하지. 왜 꼭 그렇게 해야하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정체된 지금, 내가 되살려야할 것은 다름아닌 이러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매번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 책을 꼽을 것 같다.
바로 '엉뚱한 소피의 못말리는 패션'이다.
이거 어린이 소설 맞다. 그리고 난 이 소설의 내용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소피는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아이다. 그래서 매번 새롭고 다양한 옷을 입지만 학교와 사회에서는 배척 받는다. 하지만 소피의 패션은 갈수록 난해해지고, 이에 동감된 사람들이 점점 소피를 따라 자유롭게 옷을 입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패션을 갖게 되자, 소피는 다음 날 단정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타난다.
간략한 내용만 봐도 골 때리는 소피의 저 태도는 내 평생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있었다. 쿨하고, 멋있어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반항적인 태도가 어쩌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남들과 다른 것. 반대에 굴하지 않는 것. 소피로부터 시작되어서 시지프스까지 이어지는 '반항의 길'에 내가 올라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반골일까? 아니면 그냥 오춘기를 겪는 홍대병인 걸까?
반골과 홍대병의 차이를 나누는 것은 무엇일까?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내가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은 확인했다.
이러한 반항심을 나의 아이덴티티로 삼아 창작을 하거나 프로젝트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도, 키우려고 시도하는 그림 계정도, 자연스레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열려있다. 다른 프로젝트를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참여해보고 싶다.
아이러니, 부조리, 발칙, 도발, 도전 이런 것들이 좋다. 금기에 도전하는게 좋다. 흐름을 거스를 때 내가 살아있는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살 때 뿐만 아니라, 남이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미스치프와 돌고래유괴단의 행보를 응원하게 된다.
부모님께 받고 싶었던 사랑, 혹은 친구들과의 행복했던 놀이 등 그 어떤 무엇도 유년시절에서 촉발된 동기와 원동력의 감정이 될 수 있다. 만일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겠다면, 그래서 지금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한번쯤 깊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러면 나의 순간순간의 선택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대략적인 로드맵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지도가 생긴다는 말은, 이제 어디든 조금 더 명확하게 발을 디딜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