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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Apr 13. 2020

아 미안, 내가 네 아빠라서

아버지와 딸, 그리고 아들내미

아버지와 4살 남짓한 딸. 3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사진 속 아버지와 동등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가 느꼈던 감정을 저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요. 동등한 아버지의 입장이 되고 나니 35년 전 사진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20년 넘게 함께 살았지만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아버지는 극도로 말 수가 없으시기 때문이죠.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 혼난 적이 단 한 번입니다. 거절하는 법도 모르십니다. 부모님께 요청하면 어머니를 통해 '그냥. 해줘라~'라는 말만 하셨습니다. 무관심하신 건지, 결단력이 강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모두 승낙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버지께 생각을 말하거나 함께 토론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전화하면 단 1분을 넘기지 못합니다. 아버지와 달리 말 수가 많은 아들이라서 근황, 건강, 날씨, 일거리 등 많은 소재들을 여쭤보지만, "엄마 바까주까?" 하고 바통을 넘기시거나,  "응. 그래. 밥 잘 챙기 묵고~"  자연스레 통화를 마무리하십니다. 아버지에게 분명 전화를 드린 건데, 어머니와 통화를 더 오래 하거나, 항상 밥 이야기만 하고 끝이 납니다.


말씀을 안 하시니 그의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힘드시건지, 기분이 좋으신 건지 표정에도 티가 안 나십니다. 바깥 일로 항상 검게 탄 얼굴은 그의 표정을 더욱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고통이나 질병에도 무덤덤하십니다. 마취하지 않고 사랑니를 뽑으셔도 "뭘 이거 가지고 그라노" (뭘 이걸 가지고 호들갑 떨어) 일하시던 중 철판이 다리를 때리고, 혈관이 터져 응급실에 가셔도 "게~안타." 하십니다. 겨울철 감기가 도저히 호전되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독감 진단을 받으셨죠. 입원 권유를 받으셨지만, 마다하시고 집에서 격리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감각이 무디신 건지, 고통에 취약하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한 번도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 말이죠. 항상 어머니를 통해 지난 일을 과거형으로 듣습니다.


아버지는 장애인이십니다. 어릴 적 그의 트럭에 '장애인증'이 부착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프신 것도 아니고, 몸은 성하신대 왜 장애인증이 있는 거지?' 궁금하긴 했지만, 눈치 많은 성격이라 묻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말이 없으신 아버지는 대답도 안 해주실 것 같았고요. 시간이 지나 알게 됐지만, 아버지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움직이시지 못하십니다. 아버지의 새끼손가락은 항상 구부정하게 펴져 있습니다. 담배를 피우실 때, 술잔을 들 때, 포크로 과일을 집어 드실 때, 신문을 양손으로 보실 때..  언제부터인가부터 구부정하게 펴져 있는 손가락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여전히 새끼손가락의 사연은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이야기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어리니깐 '너희들은 몰라도 돼' 하고 생각하신 걸까요.


결혼 후 추석날. 온 가족이 부모님 댁에 모였습니다. 자형과 아버지, 나는 가을 하늘 밤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야외에서 고기를 구우며 약주를 따랐습니다. 선선한 바람과, 가족의 따뜻함, 약간의 술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는 새끼손가락을 구부정하게 펴신 채로 소주잔을 비워내셨습니다. 말 많은 아들은 분위기를 살리려 가벼운 농담을 연신 던졌습니다.

" 아버지 출세하셨네요. 아들 딸 다 장가 다 보내시고~ 이제 걱정이 없으시겠어요. 언제 저는 아버지처럼 출세할까요. 허허허 "


내 농담에 기분이 좋으셨을까요 아니면 술기운 덕분이었을까요. 말씀 없으신 아버지가 모처럼 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의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대에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답니다. 손가락 절단은 면했지만, 신경을 건드려 감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결혼도 안 한 창창한 나이에 손가락을 굽히고 펼 수 없으니 얼마나 심정이 참담했을까요. '새끼손가락에서 시작한 신경망이 손을 타고 다른 곳으로 전이된다면..' 하는 어둠이 그를 덮쳤습니다. 전국에 좋은 병원과 약 집을 돌아다녔답니다. 차도가 크진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낮은 등급의 장애를 판정받으셨습니다. 내 나이 30이 넘어서야 아버지의 손가락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무관심했던 자식의 마음 때문인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눈에 넣으며 눈꺼풀을 연신 껌뻑거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겐 한 장의 추억에 불과했지만, 늦게나마 아버지의 사연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한 번도 아프다고, 힘들다고 들어본 적 없는 아버지의 어둠을 보고 나니 가슴이 뜨겁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납니다.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의 마음속이 반가웠습니다. 손가락 사연을 통해 그의 어둠과 힘들었던 과거를 느끼니 이제야 비로소 '진짜 아들'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안타깝게도 그 후로 더 이상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지만 말이죠...  아마도 가족, 가을밤, 약주라는 완벽한 조건이 다시 완성되면, 다른 이야기를 꺼내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느새 아빠가 되어 4살의 딸아이와 나란히 앉아있습니다. 35년 전 아버지와 누나의 사진처럼. 지금 아버지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나는 딸아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요. 문득 아픔을 참고 어려움을 견디며 '너는 알 필요 없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하는 지금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와 반대로 말 많은 저는 아이에게 고민, 어려움을 토로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동등한 입장이 되고 싶습니다. 부모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정한 가족'이 되었음을 가을 하늘 밤 아래 직감했으니까요. 가끔은 과묵한 가장도 필요할 터인데, 농담만 던지는 제가 부족할 수 도 있을 겁니다. 걱정도 됩니다. 딸아이가 언젠가 시덥잖고 가벼운 저에게 "우리 아빠 왜 이래?" 하고 볼멘소리 한다면, 그때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아 미안, 내가 네 아빠라서.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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