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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Apr 20. 2020

창의력의 복병

디자이너의 고집과 아집에 대하여

핵 성장 메커니즘 (nucleation growth mechanism )

물이 0도씨에서 어는 모습을 고속 촬영해보면, 점차적으로 얼음으로 변하는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결정화됩니다.  물속의 이물질은 핵으로 하여 얼음의 결정이 형성됩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이와 유사한  아닌가 싶습니다. 곰곰이 몰입하다 보면 무질서하고 혼돈된 상황에서, 어느 순간 핵심 정보를 중심으로 전략적인 아이디어가 결정화되면서 통찰력이 생겨나는 거죠."  _ 모든 비즈니스는 브랜딩이다. 홍성태 .


뇌에서 얼음이 어는 순간은 짜릿하다. 골몰하다가 번개같이 아이디어가 번쩍 하는 순간 쾌감을 느낀다. 본업인 디자인 작업을 위해 부단히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다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 아르키메데스의 기분을 체감한다. 인류를 구원하거나, 직급이 승진될 만큼의 위대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이 순간이 즐겁다. '그래 이 맛에 일하지' 조금 오버해서 이 기분에 인생의 열의를 느낀다. 핵 성장 메커니즘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학창 시절. 창의력은 타고난 능력인 것만으로 알았다. 10개 넘는 광고 공모전 수상을 통해 광고인의 꿈을 키웠고, 창의력은 무한의 바다라고 생각했다. 충만한 자신감과 약간의 오만이 만든 생각이었다. 실무를 하면서 생각은 조금 변했다. 창의력의 영감은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주위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발견을 못했을 뿐.  


실무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쥐어 짜야할 때, 약간의 방법론을 곁들이면 창의력은 얼음처럼 결정화되었다. 예로, A+B를 결합하기, 반대로 뒤집어 생각하기, 용도를 바꾸기 등 조합에 따른 아이디어가 새로움을 창조한다. 소스와 정보를 모으기 위해 하루 종일 가상 세계를 떠돈다. 사실 많이 본 놈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일지도 모른다. 소스가 많이 모이면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 수량적으로 정량적 한계를 넘으면 확실히 아이디어가 쉽게 나온다. 아이디어는 그냥 떨어져 있는 것들을 잘 주워 먼지를 털어 쓰거나 색을 바꾸어 쓰면 새로움이 된다. 카피 라이터 정철도 같은 맥락으로 '카피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카피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make 아니라 Search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아니라 우리가  쓰는 , 우리 곁에  놓인  중에서 지금 내가 표현하려는 것에  맞는 말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두리번 살피다 '이거다!'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그대로 들고  종이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게 카피입니다. 손이 아니라 눈으로 쓰는 것입니다. " _ 카피책. 정철 .


허나 나의 창의력에 복병이 있는데, 작업하고 나서 본 것 같은 디자인이 될 때가 있다. 흔히 카피캣이라고 부르는 한계에 부딪친다. 영감과 오마쥬. copy와 knock off. 애매모한 경계 속에 결과물을 저울질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타 기업의 지식 재산권으로부터 경제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는 디자이너 스스로의 괴리감이다. 첫 번째 문제는 지직 재산권에 대한 지식을 학습하고 피해 가면 될 것인데, 두 번째 문제는 은근히 골치가 아프다. 디자이너들은 대게 고집도 세고, 자존감이 높다.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은 無에서 有로 창조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작업물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는 작업은 뇌라는 발전소에서 소스를 융합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이다. 본인 또한 남의 것을 훔치면서(?) 남이 본인 것을 훔치면 화내는 아이러니 한 상황이랄까.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디자이너의 아집은 창의력의 복병이다.


The misfit economy (미친놈들의 시대) 책에서 나의 고민을 들어준다. "복제는 소비자의 구미에 맞춰 상품을 개량한다는 개념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남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혁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허슬-카피- 해킹-도발-방향 전환]  5단계로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왔음을 말하고 있다. 카피. 해킹. 도발이라는 단어만 봐도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새로운 경제와 문화가 어떨지 짐작이 간다. 인정이 힘들 뿐 이미 현실이다.  


실무를 하면서 알고 있었다. 순전히 목소리만 바꾸어도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마음껏 영감 받고, 무한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신이 아닌 이상 진정한 새로움이란 더 이상 없다. 새로움을 만들어 내기 전에 자신의 목소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졌을까.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향은 어떤 향일까'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의력은 외부의 영감보다 내면에 았는 것이 아닐까. 내 창의력의 복병은 아집이 아니라 본인만의 색과, 향을 발견하지 못한 내면의 한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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