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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May 10. 2020

그림 못 그리는 디자이너

글도 못쓰는 디자이너 이야기

10년 전 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입사 첫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애 첫 출근은 어찌나 설레던지요. 기억이 선명합니다. 정갈히 입은 정장 한 벌. 그리고 인사과 안내에 따라 소속 본부로 이동하여 배정받은 자리로 갔습니다. 슬쩍 뒤에 앉은 선임의 자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붓을 들고 스케치북에 바이올린 수채화 한 장을 멋드러 지게 그리고 있습니다. 

'뭐야 이거.. 아뜰리에도 아니고.. 내가 생각했던 디자인이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저는 입사 모집 공고에만 해당하는 자격을 갖춘 '서류형' 신입 디자이너였습니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컴퓨터가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였던 것이죠. 


'하.. 진자. 망했다. 나 그림 잘 못 그리는데...'

디자이너가 그림을 못 그린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디자이너로써 부끄럽지만 그림을 잘 못 그립니다. 그래픽 디자인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기 때문입니다. 책자나 지류를 편집하는 편집 디자이너부터, 웹페이지를 제작하는 웹디자이너, 그래픽 툴을 이용해서 아트워크를 제작하는 일러스터레이터까지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부 직종이 있습니다. 또한 학창 시절 실기보다  창의력을 바탕으로 입시가 이루어진 세대였기 때문에, 갖춰지지 않은 그림 실력으로도 디자인할 수 있는 기이한 디자이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림을 잘 못 그리는 디자이너라.. 어쩌겠습니까. '입금은 영감을 준다'라고 했던가요. 월급의 몫을 해내기 위해 퇴근 후 혼자 그림을 연습하고, 주말에 학원도 다닙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했습니다. 라이트 박스를 이용해 자연물의 실루엣을 스케치로 베껴내고, 스케치 무드만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아트워크의 결과물은 나왔거든요. 세상에 '무'에서 '유'를 만드는 디자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디자인도 어떤 디자이너의 손이 닫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느낌은 각양각색입니다. 


업무 중 하루는 아트워크를 아무리 리터칭해도 유치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결국 조언을 받기 위해 팀장을 찾아갔습니다. 팀장은 제 아트워크를 이리저리 손댔지만 그도 더 이상 개선할 수 없는 한계에 다 달았습니다. 결국 결론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냥 콘셉트라고 해. 그냥 살짝 레트로 한 콘셉트로 바이어에게 제안하자" 

솔로몬의 답 같았습니다. 누군가는 프로답지 못한 처사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는 디자인의 영역에 정해진 답이란 없습니다. 마치 바이어가 "저희가 원하는 디자인은 살짝 '아방가르드' 하면서도 '패셔너블'하고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살짝 결합한 '트렌디'한 디자인입니다"라는 요청에 답이 딱 하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디자인에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체능 영역이 매력 있는 이유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디자이너는 절대 팀원들의 아트워크를 잘못됐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각 디자이너의 특성을 살려서 바이어가 원하는 콘셉트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하며 말하던 팀장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막내야, 너에게 큰 걸 바라진 않아. 적어도 하루에 아트워크 하나는 만들자.."

어두웠던 흑역사를 가진 막내 디자이너가 이제 노련한 10년 차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요령도 생기고 기술도 생겨 하루에 몇 개씩은 뚝딱뚝딱 만들어 버립니다. 굉장하진 않지만, 저만의 색깔도 가졌습니다. 어떠한 베테랑이라도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모두 백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하얀 여백 위에 점을 찍고, 선을 긋고, 채색해야 합니다. 그리고 디자이너 고유의 색을 넣어 개성 있는 작업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지 위에 한 자 한 자 적어나가야 합니다. 그림을 연습하던 디자이너가 독서에 빠져, 이제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흰색 백지가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픽을 수도 없이 백지 위에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이 흰 바탕 위 한 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글쓰기도 한 문장부터 적어 내야 합니다. 글쓰기에도 정해진 정답은 없습니다. 타인의 비문과 맞춤법 지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만의 색을 담은 글을 적습니다. 이렇게 쓰다 보면 어느새 멋진 글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될 거라 믿습니다. 


직장에서는 디자인을 하고, 집에서는 글을 적습니다. 아주 야릇한 양다리를 걸친 '글 쓰는 디자이너'입니다. 이미지와 보내온 10년의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할 글쓰기 10년이 더 기대되는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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