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제자리에

2023. 9. 28.

여행 후유증일까. 여독이 풀리지 않은 탓일까. 오전에 잠깐 외출하고 돌아오면 오후에는 잠이 쏟아진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청소와 빨래에 며칠 동안 힘을 쏟았다. 시장에 가서 배추와 무를 사고 김치와 깍두기를 담갔다. 어제는 여권을 만들기 위해 칠레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다녀왔다.


낮에 잠을 자도 밤이 되면 다시 졸음이 온다. 학교에서 열심히 뛰어놀아 땀을 많이 흘리는 아이들의 교복을 매일 세탁해야 해서 아이들이 자고 나면 세탁기를 돌린다. 빨래만 널고 얼른 잤다.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잠이 먼저였다. 남편이 오늘은 골프를 치러 가자고 했지만 쉬고 싶었다.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편안한 시간을 누려보고 싶었다. 이번주까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음 주부터 다시 골프를 시작하기로 했다.


내일은 둘째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반 친구들과 간단하게 먹을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다. 피자는 사면 되고 김밥은 싸야 한다. 칠레 생활을 많이 도와주었던 남편 친구 부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바쁜 날이 될 것 같다. 은근히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런 건지 뱃속이 예전처럼 편안하지가 않다.


칠레에서 쉬면서 몸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정확하게는 몸이 노화되고 있음을 자주 확인한다. 음식을 먹으면 예전처럼 소화가 되지 않고 배는 사소한 일에도 자주 아프며 흰머리는 늘어간다. 한국에 돌아가면 미용실에 가서 염색부터 할 참이다. 멋 내기 염색이 아니라 새치 커버 염색이다. 서 있는 시간이 많으면 앉을 때 힘이 들고 피로감을 자주 느낀다. 추위는 더 타고 피부는 건조하다. 유전적으로 깊은 팔자 주름은 더 깊어졌다.


젊어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앞으로 나에게는 늙어질 일만 남았기 때문에 '동안'은 과감히 포기했다. 그것에까지 에너지를 쓰는 일은 나에게 벅차다. 다만 몸이 불편해져서 하고 싶은 일을 또는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은 좀 아쉽다. 내가 짠 여행 계획이지만 막상 여행지에 가서 몸이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내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내 욕심에 근거한 계획이었다.


이럴 때 친한 언니들을 만나 "나 요즘 늙은 것 같아!"라고 내가 말하고 "나도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좀 위로가 될 것 같은데.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힘들면 사람부터 찾는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걸까, 두려워하는 걸까. 둘 다 일까.


내 몸에 맞는 음식들로 나를 채워서 몸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겠다. 노화와 싸우지 않고 내 몸이 늙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겠다. 찬 맥주, 생선회, 커피, 라면, 삼겹살, 매운 고추와는 서서히 멀어져야겠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작별하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속상하다. 갑자기 이별하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니 가끔, 조금씩만 먹겠다는 핑계를 대며 천천히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벌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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