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련한 아침

2023. 9. 30.

무거운 숙제가 끝났다. 어제 점심때 아이의 학교에 피자와 김밥을 가져가서 반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과 나눠 먹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생일 파티를 학교에서 한 둘째는 선물을 받아서 그랬는지 무척 즐거워했다.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기뻤다. 저녁에는 남편 친구 부부와 맥주를 마셨다. 하필 추석이라 반찬에 신경이 쓰였다. 전도 부치고 나물도 무쳤다. 남편 친구 부부는 여행에 대해 말하며 본인들이 겪었던 소매치기 피해, 실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듣고 나니 괜히 위로가 되었다. 여행 중에는 별 일이 다 일어난다는 해외여행 다경험자의 말이 내 마음을 여행 전으로 돌려놓는 것 같았다.


마음도 정돈할 필요가 있다. 속상함, 두려움, 절망감, 부끄러움 등 내가 느꼈던 불편했던 마음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하나씩 짚으며 정리해야 한다. 어떤 마음은 '그냥 흘려보내는 방'에, 어떤 마음은 '위로가 필요한 방'에 또 어떤 마음은 '원인 분석이 필요한 방'에 분류하여 그 마음에 필요한 처방을 해야 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고 필요한 처치를 하는 것처럼.


지난 페루 여행에서 나는 여권을 잃어버리고 기대했던 기내식을 제때 먹지 못하고 여행 가방이 부서지는 일을 겪었다. 속상함이 꽤 오래갔다. 칠레로 돌아와서 여행 중 일어난 일에 대한 뒤처리를 하느라 다시 한번 속상했다. 두 번 기분 나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여권을 재발급받기까지 한 달 반의 시간이 걸린다는 대사관 직원의 말에 다시 마음이 무너졌고 여행 가방 파손에 대한 항공사의 미미한 보상에 다시 화가 났다.


오늘 아침은 모든 것이 후련하다. 당분간은 여행 계획을 짤 일이 없고 그냥 일상을 보내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여권이 오기를, 시간이 가기를. 남편에게 나는 말했다. 모든 일은 일어난 이유가 있다고. 지금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그동안 무탈하게 여행했던 우리가 잠시 해이해졌다고. 다시 조심하면서 여행하라는 뜻이라고. 여권 분실로 인한 '강제 여행 중단 명령'은 얼마 남지 않은 칠레에서의 시간을 그리고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성실하게 살라는 의미라고. 몸과 마음을 돌보며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자고.


'나'라는 의사가 '나'라는 환자에게 이런 처방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오늘도 오늘치의 인생을 성실하고 진실되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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