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1.
요즘 칠레의 아침과 밤은 춥지만 낮에는 아직 뜨겁다. 내가 사는 집은 서향이라 오후에 해가 많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하교할 즈음이 가장 덥다. 땀에 흠뻑 젖은 아이들에게 얼른 샤워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아이들의 도시락통을 설거지하며 저녁 준비까지 해야 하는 오후는 무척 힘들다. 오늘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반찬과 아침에 끓인 국으로 대충 해결했다. 오늘은 유난히 힘들고 더웠다.
나는 밤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자고 나면 조용해지는 시간을 좋아한다. 여기서는 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과 시차가 딱 12시간이라 칠레의 밤은 한국의 아침이다. 관공서든 학교든 고객 센터든 아침 9시가 되어야 업무를 시작한다. 여기서 나는 밤 9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은 성질이 급한 나에게는 어렵다.
밤이 되면 기온이 낮아져 기분이 상쾌해진다. 아이들 때문에 보지 못했던 유튜브를 볼 수 있다.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아이들 몰래 라면을 먹기도 한다. 내일 아침에 먹을 국과 도시락 반찬을 결정한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살 물건들을 적어본다. 남편과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한다. 이 정도면 내가 밤을 좋아할 이유는 충분하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나는 밤 11시 되기 전에 자야 한다. 나에게 한국과 연결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뿐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몰아서 해야 한다. 누군가와 연락이 닿지 않을 때는 초조하다. 2시간 안에 연락을 받지 못하면 또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이곳에 와서 나는 기다림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모든 일이 기다려야 이루어졌다. 하고 싶은 말도 조금 묵혔다가 하니 처음 하려고 했던 말보다 더 친절해졌다.
여유는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남에게 친절할 수 있고 시간이 많으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실수가 줄어들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고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2년간 나에게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과 돈, 둘 중 하나에 여유가 생겼는데 삶의 질이 높아졌다. 스트레스가 줄었고 남편과 다툴 일이 별로 없었다.
여유롭게 살고 싶다.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라는 타인의 충고는 고맙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충고는 거절하고 싶다. 돈은 내 마음대로 벌 수 없지만 나를 위한 시간은 내가 노력하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10분이라도. 휴대폰 충전하듯 나를 채우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