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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시작하는 마음 May 21. 2024

남편과 명상

2024. 5. 20.

집을 보기로 했던 사람은 결국 오지 않았다. 역시 칠레에서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약속은 미뤄지거나 제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칠레에 와서 새롭게 가진 마음가짐이다. 와야 오는 것이라는 것을. 계획된 일은 자주 미뤄지고 취소된다. 칠레에서 화내지 않고 살려면 내 스스로 여유와 넉넉함을 가져야 한다.


덕분에 집을 깨끗하게 치웠다. 화장실도 깔끔하게 청소했다. 반짝거리는 화장실을 보니 내 기분도 좋아졌다. 오전에 남편이 외출을 한 틈을 타서 얼른 청소를 하고 바로 점심을 준비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볶음을 했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요리인데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아니라 그런지 자주 해 먹지 않는다. 남편의 지치고 힘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싶었다.


남편과 명상을 했다. 예전에 남편에게 명상을 권유하고 시도해 본 적은 있지만 한 번의 시도로 끝났다. 남편에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한다. 남편과 함께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서 세끼를 잘 챙겨먹고 산책과 운동을 하고 있다. 우울할 때는 산책과 운동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먼저 겪어보아서 나는 알고 있다. 남편이 내가 힘들 때 도와주었던 것처럼 나도 남편을 돕고 싶다.


명상을 끝낸 남편은 요즘 잠을 설쳤는데 명상을 하면서 생각을 멈췄더니 휴식을 취한 느낌이라고 했다. 남편에게 명상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8년 전 나에게 명상이 찾아온 것처럼. 이제 나는 나에게 좋은 것을 타인에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그것이 필요한 시기가 오고 그때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내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남편에게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보자고 했다. 다만 마음이 과거로 돌아가서 후회하고 미래로 가서 걱정하는 일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만큼만 느껴야 한다. 생각으로 고통의 몸집을 더 키우거나 생각을 억압해서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과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늘었다. 그게 명상이어서 다행이다. 나와 남편이 이 기회를 통해서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 좋겠다. 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바꿀 차례가 되었다. 지금 나와 남편에게는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기보다 어떤 결과라도 기꺼이 맞이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는 것처럼 내게 오는 어떤 일도 호흡처럼 받아들이고 내보내야겠다. 그 일이 힘겹지만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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