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더가 아닌 직원'이 직무에서 리스크 테이킹을 할 필요는 없다.
* 스타트업의 '파운더'란, 처음부터 회사 설립에 기여해서
설립을 위한 자본금도 내고, 초창기에 월급 안받아가며 회사에 기여해서
결과적으로 투자금 등이 유치되었을때는 나이와 상관없이 '임원'으로서 회사 업무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 다만, 이러한 창업자 간에 불화나 대립이 있다면 회사는 산으로 간다.)
-> 입사시 부여받은 지분이 없는 (설령 유의미한 스톡옵션이 있더라도) 모든 입사자는 직책이 높아도 사실은
'그냥 회사의 일개 직원'이다.
지난 글에 이어 커리어를 한번 더 훑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 큰 IT회사의 주니어급 이력을 가진 상태에서 스타트업에 사번 5번이자, 첫번째 직원으로 조인했었다.
내가 스타트업 조인했을 시점으로부터 약 1년전, 페이스북이 상장에 성공해서 소위 대박이 났고
이를 쫓아 라인, 카카오 등도 상장을 준비하는 등 - SNS/메시징 스타트업의 성공에 대한 나름의 '환상'이 있고
국내 VC를 통한 본격 벤처 투자가 시작되기 시작한 시점이라, 약간 꿈과 희망이 넘쳤던 시기였고
회사의 서비스는 출시된지 거의 1년이 지나고, 나름 앱 다운로드/가입자 숫자가 10만명 단위에
최소한의 MVP를 구현했고 PMF을 통한 폭팔 성장을 노리기 시작한 상황이었음.
나는 '교육 SNS'의 영역으로 인정받았던 이 스타트업의 신규 입사자로서
회사의 핵심 사업 아이템이, 내가 10대/어릴적에 꿈꾸던 어떤 소망을 간접적으로 이루는것과 연계되었고
'공교육'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건전한 슬로건을 갖고 있었고, 내가 리드할 수 있는 포지션이 되는게 좋았음.
사내 기존 파운더 & 개발팀의 입장에선
병특 경험자 외엔 대형 IT 회사 경험자가 없는 (대학원 갓 졸업한...) 상태에서 한번이라도 체계적인 개발/운영
프로세스를 경험한 이가 들어옴으로서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소소한 부분들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던 것 같다.
> 덕분에 제대로된 면접 한번 없이,
한두번의 티 타임/파운더들과 밥한번 같이 먹고 지인 추천으로 입사에 무난히 성공했음.
--------- 입사 초기
초창기에는 회사의 구성원 연령대가 평균 28.5세 / 30세가 최고 연장자 였나 수준으로 아주 젊은 회사로서,
인원 수(경력 연차로 치면 3년 전후의 8인 + 파트타임 개발 인) 대비 넉넉했던 초기 투자금(10억원) 덕분에,
힙한 가로수길 한복판에 멋진 오피스도 구하고, 소위 재밌게 일하는 젊은 느낌의 좋은 회사로 시작할 수 있었음.
입사 후 첫 1년은 나름 고생도 했지만, 이때는 꽤나 일이 재밌었음.
- 서비스 MVP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서 개선 의견도 많이 내고, 매일 매일 성장하는걸 보는 재미도 있었고... 투자금이 들어온 뒤로는 오피스를 꾸며나가는 / 회사가 성장하는 재미가 있었달까?
다만 업무를 해야하는 개발자로서는, 생각보다 '체계적이지 않은 - 컨벤션도 뭐도 없이 마음대로 짜여있는 스파게티 코드'를 뜯어서 체계화를 시켜야했는데
기존 코드 작성자 중에 일부는 아직 학생 (대전 K대학에 석사/박사 과정이라던가 등의 사유로) 이라
원격으로 일하고 1달에 한번 정도 회사에 방문해서 다음 과제를 전달 받아서 자택 근무를 진행하는 상태였고,
(공식 사내 메신저도 없고, 화상 미팅 같은 것도 없던 시기니까 그냥 카톡으로 연락해서 비동기 대화로 이슈를 풀어야했고)
각자가 본인 업무에 바빠서 나를 챙겨줄 현장의 사수 등은 없는 상황? 덕분에
(이건 내가 직전의 큰 회사에서 팀내 비율 할당형 성과 상대평가를 당하며 생긴 안좋은 습관일수도 있는데)
사무실에 없는 원 코드 개발자 분에게 편하게 연락해서 잘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이것저것 시도해봐도 뜻대로 잘 안되서 끙끙 앓아도 해결이 안되서 맡은 업무를 지연시키는 상황이 종종 생겨났다.
> 다른 개발자의 작업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확장성도 없이 일단 기능이 돌아가게만 작성된
통파일 10만줄 코드들 어딘가에 숨은 버그를 발견해서 고쳐가면서
새 기능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하시면 된다... 원 작업자조차도 어 이게 왜 안되죠?라는 상황.
> 이게 사실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설계되지 않은 코드를 가진 - 초기 스타트업 개발팀의 진짜 힘든 부분이다.
(비개발자를 위한 약간의 디테일 추가)
SW 개발 문화에서 이러한 '레거시'의 진짜 무서움은, 마치 사람의 팔에 침을 꽂았더니 다리가 마비되더라; 인데, 왜 마비되는지를 원 작성자도 모르다는데 있었다... 그냥 몸으로 때우고, 버그 찾아 사후 수습하는 방식인데
문제가 생겨도, 원 코드 작성자가 감에 의존해서 몇 번의 시도를 통해서 문제를 고치는게 훨씬 시간이 빨랐고, 그냥 나는 이게 문제라는걸 알려주고 잘 고쳐졌는지 확인하는 형태로 점점 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 - 대략 3명 정도의 원격 파트 타이머 개발자가 있었는데 결국 누군가는 시간을 내서 이들의 코드 동작을 확인해야 했다.)
> 덕분에 내가 들어와서 첫 몇 달간 야심차게 진행 했던 작업은 처음엔 완전히 내부 구조를 새로 가져가서 코딩 리팩토링을 하려고 했으나, 원 코드 이해가 안되서 목표 일정을 몇 번 지연시키고는 내 능력 부족을 선언하고 포기. 나도 나만 알아보게 잘 짠다고 생각했지만; 한수 위였다. 이렇게 짜는 것도 어쩌면 천재적인 업무 능력
->> 결국 나중엔 이걸 계속 비효율적으로 조금씩 기능 업그레이드 / 개선 하는걸 모두가 포기하고,
병특 능력자들의 힘을 빌어서 2015년 여름의 어느날엔 그냥 새로 갈아엎은 2.0 버젼을 출시했다. (웹 버젼)
이후로는 약간의 신기능 개발 외엔 첫 반년간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블랙박스 기반의 SW 품질 관리'에 썼다.
(신규 개발 코드는 TDD로 코드 퀄리티 올리기, 자동화 테스트 붙이기, 개발-배포로 이어지는 개발 프로세스 만들기, 페르소나별 테스트 시나리오 만들기, next의 프레임워크 선택을 위한 연구/선행개발) 업무를 했음.
그리고 약 2년 뒤 -
여전히 레거시 소스는 못건드려도 테스트쪽은 아주아주 고도화해서, 그냥 테스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게
모두 자동으로 테스팅 되었다고 보면 된다. (덕분에 나의 워라벨은 아주아주 좋아졌다; 기계가 일 다 해줬음)
> 덕분에 회사에서 내 역할에서 개발자로서 업무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SDET/QAE에 가깝게 변해갔음.
소프트웨어 품질 관리쪽 (테스트 자동화/QA/수동 테스트도 포함) + 다른 개발자들의 코드 퀄리티 검수 +
+ 시스템 운영 관리 업무 (지라 운영, GA 운영, 대시보드 운영 등) + 인턴 & 신입 사원 초기 케어 +
+ 좀 더 나중엔 정부 과제 담당자 (각종 양식에 맞춘 문서 작업 등)으로 역할이 완전 넘어갔음.
훗날엔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내가 원하는 - 개발 외적인 다양한 다른 업무를 (전략/기획/프로젝트 리딩) 더 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크게 다음 커리어에 대한 고민 없이 업무 롤을 완전 전환했던 'Yes'맨이 되었는데
-> 그리고 이건 지금 2020년 시점에 돌이켜보면 파운더가 아닌 이의 순진했던 어리석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당시 팀 멤버들이 마인드셋이 참 좋았고, 초기 스타트업에서는 배울점이 많았기에, 업무 변경에 따른 '퇴사'라는 선택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지만 내 개인의 커리어 관리라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한 셈.
이를 단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어느순간 나는 내가 뭘 잘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잡부에 가까운 역할이 되었고, 직업 전문성을 모두 잃었다.
(이게 파운더라면 엄청 큰 고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성과 기반의 '월급받는 직원'으로서는 꽤 문제가 되었다.)
> 이때 나와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입사했던 세 명의 직원들 중에 두 명이 각자 나름의 사유로 1년 이내에 이른 퇴사를 했던것 같은데, 나는 회사의 성장 가능성에 약간 크게 배팅해서, 스톡옵션 행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만 2년은 채워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뭐 사실 이때는 1년도 안채우고 퇴사하는걸 좋게 볼수는 없었던 상황이고 뭐라도 소기의 성과를 이루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지라.... 그 다음 1년은 D-Day를 정해 둔 상태에서 PM으로서 나름의 새로운 전문성 준비 기간이었음.
결과적으로, 이건 첫 스타트업에서 한번에 정착 성공 커리어를 남기지 못한 자의 뒤늦은 후회일 수도 있는데,
동료와 회사를 사랑할지언정, 회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본인을 희생하진 말라는 조언을 살짝 남기고 싶다.
(단, 직원의 경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