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국기와 국가(國歌)가 좋아서 외교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게 좋았습니다. 백과사전을 열어 나라 이름 표제어를 찾아서 국기를 구경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다닐 때 집에 인터넷이 들어왔는데, 요래조래 검색하다가 '세계국기데이터베이스(World Flag Database)'이라는 누리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국기를 총망라한 곳인데 팔레스타인처럼 아직 국가(國家)로서 독립하지 못한 영역과 퀘벡처럼 한 나라의 지방에 불과한 곳의 깃발까지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놀랍게도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더라고요. 저는 이곳에서 국기를 내려받고, 온라인 백과사전에서 국가 음원을 녹음하여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다음카페에 '세계국가정보'라는 모임을개설하고 미국 중앙정보국 월드 팩트북(CIA World Factbook)을 번역하여 백과사전식으로 나열된 정보를 올리곤 했습니다.
외교부에서 일하면 외빈(外賓)을 맞이할 때 의전 업무를 담당하는 줄로 알았고, 그렇게 '덕업일치'(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음을 일컫는 은어)를 이룰 것만 같았습니다. 게다가 외국 여행 좀 많이 해본 사람들조차도 좀처럼 가볼 일 없는 적도기니 같은 생소한 나라에 공용 여권을 들고 가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외무고시에 도전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고 국익 수호의 일선에 서겠다는 사명감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 일이 제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참 대책 없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 공부를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한국외대 입시에 떨어진 저에게 고시(考試) 경제학의 장벽은 너무나도 높았습니다. 국제법이랑 국제정치학은 재미있기도 해서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경제학은 무게가 200킬로그램짜리 바벨 같았습니다.
짐 싸 들고 신림동 고시촌으로 와서 방 한 칸 잡았고, 당시 경제학 '일타강사'로 이름을 날렸던 황종휴의 예비순환 강의를 들었지만, 그마저도 제겐 버거웠습니다. 강사가 나눠준 교재에 등장하는 시그마(Σ)와 로그(log)는 "어이, 거기 수학 못 해서 외대 낙방했다는 친구, 네까짓 건 여기 앉아 있을 자격이 없다니까"라고 저를 조롱하는 것 같았습니다. 온갖 수식이 난무하는 경제학 서술형 기출 문제들을 보는 순간 숨이 턱턱 막혀왔습니다. 그래서 외무고시 치르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저 같은 사람이 외교부에 들어가지 않은 게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는 이름과 깃발에서 출발해서 이름과 깃발 그 자체가 됩니다. - 괴테 -
비록 외교관이 되지 못했지만, 국기와 국가에 대한 제 관심은 전혀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길을 걷다가 파에야를 파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걸린 스페인 국기가 눈에 띄면, 저는 걸음을 멈춰서 한참을 쳐다보기도 합니다. 국기가 제게 뭔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거든요. 사실 국기는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국기뿐만 아니라 깃발로 만들어진 모든 기장(旗章)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걸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기학(旗學, vexillology)이라고 합니다.
저는 온라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ædia Britannica)에서 국기 관련 표제어를 찾아서 내용을 번역하여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곤 했는데, 월드컵 축구대회나 올림픽 때 제가 올린 글의 조회수가 느는 걸 보고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제가 외교관이 되었더라면, 바쁜 나랏일에 치이느라 남의 나라 국기에 담긴 뜻이나 외우는 한가한 취미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외교부는 직원들의 야근이 가장 잦은 정부 기관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던 중에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기의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는 사실과 국기가 여러 차례 바뀐다는 사실 말이죠.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깃발을 이루는 주요 부분의 명칭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거든요.